서로의 언어를 교환하는 친구와 <위로공단> 상영회에 다녀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크린이 올라가면 친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될까 막막했다. 옛날 한국이 아직 지금처럼 발달되기 이전 7080년대의 이야기에서 끝났다면 과거의 일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텐데. 당시 빨간 방의 안보실로 끌려갔던 김진숙 위원장이 크레인 위로 올라갔을 땐, 밀레니엄의 변화를 겪은 시간이 흘렀을 때이자 나의 첫 집회였을 때였다. 그렇지만 그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경험으로 사회에 축적되어 조선업엔 더 강한 그리고 더 서늘한 바람이 불고있다. 
    시간은 흘러 세상은 변하긴 했다. 노동환경은 먼지 가득한 공장에서 이유없는 모욕 가득한 콜센터로, 할당된 옷감더미는 모니터나 패드 속 업무실적으로, 옷 따라 실려가는 피비린내의 국제적 방향도. 착취는 글로벌화되고 디지털화되었다. 타인의 불행은 포화되어 진부한 이미지로 남아 더이상 개인 혹은 공동체의 서사를 만들지 못한다. 
    그런데도 나는 지난 만남에서 친구에게 강남역사건을 이야기하며 한국 사회가 변했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친구는 서툰 독일어로 이야기했던게 오늘 영화를 보고는 이해가 간다고 했다. 한동안 외쳤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는 표현은 그 옛날에도 있었더라. 노동이든 성별이든 그 아떤 기준으로도 혐오나 차별의 대상이 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선험적 조건인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다면. 그렇기를 바라고 또 믿는다. 믿는게 있어서 살아갈 수 있다.


(마지막 말은 명백히도 베를린 비엔날레를 염두한 말이다. 미래를 상정하지 않기에 나오는 조롱과 냉소는 웃기지도 않고 힘을 빠지게 한다. 쿨함으로는 불안을 이겨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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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s Read> The Berlin Art Book Fair 2016

10-12.Juni.2016

http://missread.com/


인스타그램 게시물

Sternberg Press의 <Publishing as Artistic Practice> 출간 기념 강연이 있다해서 가보았더니 베를린아트북페어가 열리고 있었다. 앉아있는 판매자들과 이야기 나누는데 친구들과 함께 <부침가루>로 참가했던 작년 UE7이 생각났다. 언리티드에디션의 베를린판, 구태여 설명하자면 전세계판이었다. 
베를린비엔날레 이후로 한국의 모습이 이곳에서 계속 겹친다. 익숙한 미래와 그러 인해 불투명한 현재를 담론이 아닌(HKW 등을 필두로 베를린 미술의 특징은 내게는 진지한 담론 생성이었다, 나중에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번 비엔날레에서 기존 베를린과 다소 상이한 느낌을 받는건 뉴욕 베이스의 엄청나게 젊은 콜렉티브 DIS가 큐레이팅을 맡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일단의 드러내기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태도와 작품의 형식은 한국 미술계를 상기시킨다. 그곳도 여기도 유토피아적 대안이 불가능하기에 가망없는 무한한 대안이 존재하고 있다. 
다만 이곳에는 레퍼런스가 가득하기에 나로서는 한숨 돌릴 수 있다. <부침가루>를 준비할 때 친구들과 어째서 우리가 공동 프로젝트의 형태로 독립출판이란 매체를 택했고 이것이 예술적 실천이 될 수 있는지, 우리의 컨텐츠와 디자인 나아가 유통방식은 그에 적합한지 고민했던적이 있었다. 오늘 산 이 책에는 60년대 첫 실험부터 포스트디지털 시대 독립출판 및 유통 자체를 재생산하는 지금까지 이야기되어있다. 비엔날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포스트컨템포러리나 포스트인터넷도 며칠간 구한 텍스트들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어딘가 닮아있는 이 모습들을 친구들과 나누려고 소식들을 물어다 나르고 있다. 지난 갤러리위크엔드 소식은 미술세계 5월호에 단신으로 실었고 이번 비엔날레 소식도 작성 중이다. 그렇지만 사실 지금은 그보다는 친구들이랑 술마시며 한바탕 이야기하고 싶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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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샤 발츠의 <Twenty to Eight>을 보고 글을 쓰다가 왜 (언어가 없는) 무용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벅찰 수 밖에 없었는지 이야기하려다 앞부분이 너무 길어졌다. 공연 감상이라고 하기엔 부적절하지만 아직은 공연 보는게 이렇다,라는 정도의 글은 되겠다 싶어서 그냥 따로 적었다. 감독이나 작품 혹은 공간에 대한 정보는 담지 않았다. 


베를린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본 공연은 Christoph Marthaler 크리스토퍼 마탈러의 <Hallelujah>였다. 광주 예술극장 아워 마스터즈 시즌 중 마털러의 작품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베를린으로 와버려 보지 못하게 된 아쉬움이 있었던 참에 Volksbühne 베를린 민중극장에서 프리미어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예매했었다. Volksbühne는 지난 여행에 이은 두 번째 방문이었다. 사실 그때 누구의 어떤 작품을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숙소 앞에 큰 극장이 있었는데 그게 Volksbühne였고 베를린에서 괜찮은 극장 중 하나라는 어렴풋하게 들었던게 생각나 바로 가서 공연을 보았었다. 8시 공연이었는데 끝나고 나오니 12시가 넘었었다. 처음부터 관객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끝날 때 즈음에는 10줄 안팎의 사람들이 무대 앞쪽에 옹기종기 남았었다. 작품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회전 식의 무대나 무대 중앙에 설치된 수로 등 무대 장치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나, 무대 위에 실시간으로 카메라맨들이 등장하고 그 이미지가 무대 한편 스크린에 영사되는 방식의 비디오라는 매체를 사용하는 방식들을 주로 보았다. 이런 매체의 전면적인 쓰임은 이제는 한국에서 실험이라 부르기 무색하게 흔한 방식이 되었기에 약간은 공부하는 마음으로 관찰했다. 내용도 이해할 수 없고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공연장에 끝까지 앉아있었던 건, 4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배우도 작품도 나도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지난함 속에서 서로의 현존을 확인하며 자리를 지켰다. 이번에 본 <Hallelujah>에도 자막이 없었고,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탈러에 갖고 있는 막연한 이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의 작품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건 스틸컷을 보았을 때 마치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 작업에서 볼 수 있는 납작하게 눌린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는데, 공연은 스틸컷에서 내가 느꼈던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조명과 무대미술이 만드는 정돈된 색감, 기본적인 연극의 구조는 갖추었지만 극적 전개 없이 대부분 노래로 흘러가는 구성, 특징적인 관계망 없는 인물들 - 이런 것들로 인해 <Hallelujah>는 특정 시공간 속 입체적인 사건이 압축된 평면으로 드러났었다. 마탈러의 작품 전반을 흩어보았을 때 빠지지 않는 유머러스함을 여전히 지니면서 말이다. 감이나 알고 있던 사실을 직접 확인하는 즐거움은 있었지만, 사실 작품에 충분히 집중할 수 는 없었다. 이전의 여행자의 마음과는 달리 삶의 자리를 옮긴 이번에는 작업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외국에서 혹은 외국어로 진행되는 공연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되었고, 경험했다는 것 자체로 만족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공연예술을 공부하겠다 왔건만 작품에서 이질감은 어느정도 비참하긴 했다. 아직은 당연한 일이긴 하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집에 돌아와 자질구질한 올해 목표 100가지 목록에 ‚독일어로 된 공연 이해하기’라는 한 줄을 하나 더 적는 정도. 그때는 제대로 된 감상 글도 남기고 싶다. 



<Tessa Blomstedt gibt nicht auf> 

최근 광주 아시아예술극장에서 재공연한 작품. 이 스틸컷 하나로 감독의 정보를 찾기 시작했었다.


<Hallelujah>


사진 출처 Volksbüh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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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환경조각전  

구재회, <서울특별시 마포구 와우산로94(상수동) 홍익대학교 F동 20302호>



 구재회, 서울특별시 마포구 와우산로94(상수동) 홍익대학교 F동 20302,

2.3m X 1.2m X 2.1m (가변)

    구석진 곳에 스펀지 모양의 집 두 채가 있다. 원래 있었던 듯 무심하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본다면 그냥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스펀지 집은 자신의 크기와는 맞지 않는 곳에 들어가 있다. 스펀지라는 소재는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유연성에는 한계가 있어 자기 자신을 구겨 넣어야 한다. 편하지 않은 듯 다른 장소로 옮겨 간다. 때로 편하게 보일 때도 있지만 완벽하게 들어맞는 공간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와우산로94(상수동) 홍익대학교 F동 20302호>(이하 <20302호>)는 두 덩어리의 스펀지이다. 각각의 스펀지는 두 채의 집 형상으로 서로 붙어있다. 한 칸뿐인 집이지만 구색은 제법 갖추고 있다. 노란 단색의 스펀지에 새겨진 벽돌 모양에서는 빨간 벽돌이 눈에 선하다. 창문, 계량기, 문고리도 있으며 현관에는 호수가 적혀있다.

 

   302호는 작가가 살았던 옥탑방의 호수이고, 그 숫자를 다르게 배열한 203호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작업실이다. 거주공간과 작업공간인 격이다. 내 집 없는 모든 이들이 항상 떠날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처럼, <20302호>는 전시 기간 동안 여러 번 옮겨 다녔다. 살만한 곳을 찾다가 괜찮겠다 싶은 곳이면 다시 자리를 잡았다. 만만치 않은 무게의 스펀지 집 두 채를 옮기는 것은 이사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조금 더 괜찮은 곳이 있을까 찾아다닌다.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집은 안정을 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하지만 스펀지로 만들어진 <20302호>는 유약하다. 쉽게 더러워지고 너덜너덜해진다. 서 있는 모습 또한 위태롭다. 구석에 대각선으로 비집고 들어가 땅에 발 딛지도 못하고 허공에 매달려있다. 이보다 편한 장소를 찾을 때도 있지만, 그 곳에서도 낑겨 있는 건 매한가지이다. 그렇게 옮겨 다니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현실의 모습이다. 내 집 마련은커녕 계약 기간이 만료될 때 마다 불안해해야 한다. 모퉁이 한 구석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 많은 노는 땅은 모두 임자가 있다. 미술이라는 지대도 그렇다. 권위로 가득 찬 그곳에서 함께 살아가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서는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수밖에 없다. ‘아프니까 청춘’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청춘이든 아니든 덜 아파야 한다.


 


  <20302호>는 우리의 상황을 보여주지만 냉소나 체념은 아니다. 덜 아프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만들려는 움직임이다. 틈이 없는 공간(space)에는 거대서사만 있을 뿐 개인의 이야기는 없다. 지각할 수 있는 감각은 제한되어 있으며 개인의 경험은 말소된다. <20302호>가 전시된 환경조각전도 마찬가지이다. 전시장을 벗어난다는 이유로 눈에 띄는 형태를, 흠집 하나 없는 매끈한 상품처럼 좋은 퀄리티를 요구받는다. 작품들은 밖으로 나왔지만 강요의 틈바구니에서 그저 물리적인 공간을 떠돌게 된다. 스펀지 집은 이 공간을 장소(place)로 변환시킨다. 필연적으로 부유하는 삶이지만 적극 나서서 자신이 위치한 땅을 경험하며 스스로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다. 이로 인해 견고하게만 보이던 공간에 균열이 생기고 개개인이 들어설 장소가 생긴다. 두 채의 스펀지 집은 스스로를 변형시켜가며 힘겹게 자리를 만들어간다.

 

   이 과정에 스펀지라는 소재는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스펀지는 상처 입기 쉽다. 그러나 <20302호>가 입은 상흔은 능동적인 흔적이다. <20302호>의 스펀지는 위치한 공간을 자신의 감각으로 온전히 지각하기 위해 그 곳을 흡수한다. 그 결과 모양이 변형된다. 스펀지의 탄력성에는 한계가 있어 복원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완벽하게 원형으로 돌아오지도 못한다. 그렇게 이동하며 경험하는 장소마다 쌓이는 상흔은 굳은살이 된다. 틈을 내어주지 않는 공간과의 마찰로 인해 생긴 단단한 살이다. 

 


   살아가는 매 순간이 투쟁이다. 살아갈 틈새는 없고 그로 인해 자신의 존재마저 희미해지는 공간에서 애써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20302호>는 부유의 삶을 거부한다. 스펀지 집이 비집고 들어가는 구석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만은 아니다. 개인의 사유는 배제하고 거대한 논리만이 지배하는 현실의 공간이다. <20302호>는 덜 아프고 더 잘 살기 위해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리고 이동의 과정은 스펀지 집에 아로새겨진다. 형상은 결코 완성되지 않지만, 자신의 감각으로 지각한 장소들을 몸에 새겨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20302호>는 이동할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삶 속에서 스스로를 확립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원문 

http://blog.naver.com/uploadsoon/220056595880


관련 기고

 

2014 홍익대학교 조소과 환경조각전 이정원 <홍익발언대> 

http://blog.naver.com/uploadsoon/220092250562

 2014 홍익대학교 조소과 환경조각전 총평

http://blog.naver.com/uploadsoon/220092316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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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나열된 계층의 집> 

마포구 창전동, 서교동, 동교동 그리고 상수동 일대 (2014.5.18-6.15)



1.


<나열된 계층의 집>은 다섯 개의 공간을 바탕으로 한다. 각 공간 혹은 공간을 이어가며 여러 참여 작가들의 작업이 진행된다.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들은 있지만 동시에 없는 공간들이었다. 어떠한 이유에서 제 역할을 잃은 공간들은 버려졌다. 버려진 공간들은 그곳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 으레 폐쇄된다. 담을 것이 없어진 공간 자신마저도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비워졌다. 그렇게 공간은 없는 공간이 되었다.


김동희가 작가가 발견한 공간들은 ‘집 The House’, ‘오픈 가든 Open Garden’, ‘주차장 Garage’, ‘서교센터 Seogyo Center’ 그리고 ‘프리홈 Free Home’ 총 다섯 개다. 이들은 모두 마포구 창전동, 서교동, 동교동 그리고 상수동 일대에 위치해있다.


‘프리홈’은 공간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새로운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장소이다. 홍익대학교 F동의 외부계단 꼭대기에 위치하는 이곳은 그저 통로의 끝으로, 버려진 공간이었다. 2011년 살고 있던 월세방이 재개발되면서 작가는 현실적인 문제를 안고 이 공간에서 거주하는 <프리홈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다른 집을 구하기 전까지 ‘프리홈’은 약 5개월가량 작가의 거주 공간이 되었고, 이후 간간이 전시장으로 사용되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공간은 모두 이번 프로젝트 속에서 새롭게 발견된 공간들이다. ‘동강해물탕’이라는 음식점 옆 굳게 닫힌 철문에서 시작하는 ‘오픈 가든’은 P 아파트로 통하는 골목으로, 여기에는 작은 정자가 있다. 이곳은 홍대 번잡한 상권 한 가운데 위치한다. 그러다 보니 이 정자에 아파트 주민이 아닌 사람들이 모이다 가기 시작했고 주민들은 결국 이 길을 폐쇄했다.


‘주차장’은 작가가 살고 있는 건물에 위치한 주차장이다. 작가가 삼 년 동안 살면서도 이곳이 있는지 알지 못했을 정도로 ‘주차장’은 주차장으로서의 역할을 잃고 셔터로 닫혀 내부 공간을 비워두고 있었다. ‘서교센터’는 서교예술실험센터 지하에서 외부로 향하는 비상계단으로, 흔히 전시장으로 쓰이는 지하 다목적실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집’은 홍익대학교에서 창천동 삼거리로 향한다면 누구나 지나쳤을 공터이다. 공터 아래로는 경의선이 지나고 위로는 와우고가차도가 있다. 이 공간은 숲길 부지로 예정되어 있으나 오랜 시간 동안 휑하게 비어있다.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공간은 곧 아무것이나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의미를 잃어버린 버려진 공간은 규범으로부터 자유롭다. 김동희 작가는 공간을 바탕으로 한 관계에서 통상적인 계약관계를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작가는 관리소장, 공무원, 건물주, 세입자, 아파트 동대표, 공간 인근 주민들 등 공간을 둘러싼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의 협의를 통해 장소를 개방했다. 공간을 둘러싼 관계에서처럼, 목적 없는 공간에 정해진 것은 없다. 김동희 작가는 발견하고 개방한 공간에 새로운 장을 모색한다. 공간은 잃어버렸던 역할을 되맡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부여받는다.



2.


<나열된 계층의 집>은 김동희 작가의 기획이지만, 동시에 여러 작가의 작업들로 이루어져 있다. 설치, 퍼포먼스 등의 작업들은 한 공간에 한정되기도 하고 공간들을 이어 진행되기도 한다. 장소와 작업의 계층이 겹쳐져 김동희 작가의 배치는 다양한 층위를 띄게 된다.


‘프리홈 Free Home’ - 김유신, <incognizable sound(인식되지 못한 익숙한 소리들)>


김유신 작가의 <incognizable sound(인식되지 못한 익숙한 소리들)>는 김동희 작가가 ‘프리홈’에서 거주했던 이후로 이곳에서 열리는 네 번째 전시로, <나열된 계층의 집> 전시 기간과 겹쳐 전시된다. 통로를 따라 계단을 쭉 오르면 좁은 흰색 공간이 나타난다. 그곳에는 대형 스피커와 스피커가 뿜어내는 소리를 시각화한 그림이 걸려있다. 특이한 것은 이 소리가 온몸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작가는 가청주파수와 비가청주파수 경계에 있는 소리에 관심을 둔다. 들리지 않게 되는 주파수는 20Hz 이하이지만, 이번 전시에서 들려주는 소리는 스피커 사양 상의 한계로 인해 40-50Hz이다. 이 영역의 소리는 귀로 들리면서 동시에 진동으로 몸에 울려 퍼진다. 가슴과 배에서 느껴지는 떨림을 통해 소리를 듣는 다른 방식을 인식하게 된다. 청각 혹은 촉각 등 규정된 감각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새로운 감각을 발견한다.




‘오픈 가든 Open Garden’ - VERYTHINGS, <VERYTHINGS RESORT>


‘오픈 가든’이 위치한 P아파트 통로는 홍대와 맞물려있다. 한적한 곳에 위치했더라면 괜찮았겠지만, 번화가 한가운데 위치하기에 오가는 사람이 많아 폐쇄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신없는 홍대를 걷다가 눈에 띄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곳이 나온다. 오랫동안 방치된 아파트 통로는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마냥 풀이 우거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곳에 하얀 자갈을 깔고, 타일 사이사이 돋아난 이름 모를 풀들처럼 자갈 위에 듬성듬성 선인장 화분을 놓았다. 또한 자갈처럼 흰 타월이 깔려 있어 누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모던 유토피아 리빙(Modern Utopian Living)’ 컨셉을 중심으로 ‘자연과 음식’을 실험하고 발전시키는 크리에이터스 그룹 베리띵즈(VERYTHINGS)는 이곳에 유토피아를 만들어낸다. 현대 삶에서 유토피아적인 삶의 방식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일상적인 삶의 터전과 빠른 발걸음이 지나가는 거리 사이를 이어주는 짧은 골목에, 여기만큼은 목적을 쫓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다. 작은 철문 하나를 두고 하늘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없어졌다 생겨난다.




‘주차장 Garage’ - 노상호, <Marchen Box - Daily Fiction>


‘주차장’에 설치된 구조물은 원래 이곳에 있을 계획은 아니었다. 맞은편 아파트 103동 벽에 설치하려 했으나 협의를 얻어내지 못했다. 대신 작가가 3년 동안 거주한 건물 사장님과 주차장 옆 세입자의 승낙을 통해 이곳 ‘주차장’에 일시적으로 세워두게 되었다. 주차장 셔터를 올려 들어가면 구조물과 노상호 작가의 <Marchen Box - Daily Fiction>전시를 볼 수 있다.


구조물 끝에 놓인 의자에 앉으면 <Marchen Box - Daily Fiction>의 설명서가 눈에 띈다. 설명서대로 녹음 카세트를 틀면 작가가 읽어주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이야기에 맞추어 작가가 그린 이미지 슬라이드를 프로젝터에 넣는다. 독일어 "Marchen"은 “동화”로도 번역되기도 하지만 노상호 작가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메르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표기한다. 메르헨은 ‘화롯가의 이야기’라는 본뜻을 가지고 있으며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시간, 장소 그리고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해진 것이 없기에 누구의 이야기도 될 수 있다. 카세트에서 너의 이야기를 듣고 그림 속에서 나를 본다.



‘서교센터 Seogyo Center’


‘서교센터’는 서울시 창작공간 중 한 곳인 서교예술실험센터에 위치한다. 사회적 신뢰도는 공공기관에서의 전시를 통해 전시와 함께 부가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나, 이는 사람들과의 협의를 만들어 나가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동희 작가는 서교예술실험센터를 택해 사회적 신뢰도를 얻는다. 그러나 작가가 전시 장소로 선정한 ‘서교센터’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신뢰도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장소이다. 작가는 흔히 전시장으로 이용되는 지하 1층 다목적실이 아니라, 이곳에서 외부로 향하는 비상계단을 사용했다. 전시가 진행되는 비상계단은 매우 좁고 짧다. 작가는 이곳에 ‘동강해물탕’에서 버려진 간판을 세운다. 간판에는 바다와 바다 속 물고기들이 있다. 간판이 뿜어내는 파란색 빛과 좁은 공간의 탁하고 후덥지근한 공기는, 어디서 오는지 모를 비릿한 냄새를 풍긴다.



3.


여러 전시와 더불어 오프닝 날에는 퍼포먼스도 진행되었다. 이날에는 수박과 음료를 나누어줘 휴양을 즐기게 해준 VERYTHINGS의 개장 서비스, 박혜민 작가의 투어 퍼포먼스 그리고 베이시스트 조르바와 INstadio Movement가 함께하는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박혜민 투어 퍼포먼스, <잃어버린 설이를 찾아서>


박혜민 작가의 투어 퍼포먼스 <잃어버린 설이를 찾아서>는 ‘서교센터’에서 시작해서 ‘집’을 끝으로 공간들을 안내한다. 박혜민 작가와 함께 둘러보는 공간 중에는 <나열된 계층의 집>에는 없는 ‘창천 데시앙 자생 식물원’이 있다. 설명에 따르면 ‘창천 데시앙 자생 식물원’은 쉽게 볼 수 있는 나무들이 자생적으로 살아 생긴 곳으로, 2013년 '서울 내 우리가 지켜야 할 10곳'으로 선정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실 ‘창천 데시앙 자생 식물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공간은 ‘집’이 지금 있는 자리에 위치하기 이전에 염두 했으나 협의를 이끌어 내지 못해 포기한 공터이다. 박혜민 작가는 서울 내 이국적인 장소들을 찾아 중국, 인도 등의 나라를 허구적으로 재현해 여행상품을 판매하는 'Hpark 여행사‘를 운영한다. 이번 투어 퍼포먼스에도 허구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는 현실과 떨어져 있지 않다. 작가는 허구를 통해 실재를 소환한다. 아무도 모르게 자라고 있던 식물들을 호명하면서 동시에 보지 못했던 공간에 주목하게 한다.


‘집 The House’ - <조르바 x INstadio Movement>


‘집’은 이와 조금 떨어진 공터에 자리 잡고 있다. 김동희 작가는 이곳에 실재 건물 크기와 같은 파란색의 블루프린트를 설치했다. ‘집’에서는 베이시스트 조르바와 현대무용 그룹 INstadio Movement가 함께하는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선율과 안무는 블루프린트 위에 앉은 관객들의 몸을 오르내리며 건물을 지어나간다. 평면의 계획뿐인 건물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 순간의 소리, 몸짓이 내뿜는 호흡 그리고 고가차도를 지나며 걸음을 멈추는 사람들이 모여 집을 만들어나간다. 집은 각자 다를 것이다. 그러나 집의 기반은 모두 같은 곳에서 시작한다. 울퉁불퉁한 공터 위 작가가 평평하게 만든 블루프린트는 그런 기반이 된다.





4.


제 일 없는 공간은 인식에서 없어져 간다. 그러나 그 빈자리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곳이다. <나열된 계층의 집>은 이런 다섯 개의 공간을 발견하고 제시한다. 공간은 폐쇄된 장소에서 개방된 장소로 변화하지만, 방치된 공간이 지니는 자유로움은 유지된다.


다섯 개의 공간들은 시작부터 규범적인 계약관계가 아닌 협의의 과정으로서 시작되었다. 전시가 진행되면서도 예정되었던 공연이 민원으로 취소되기도 하며 조율은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하나의 합의가 없을 때 우리는 다양한 생각을 떠올려볼 수 있다. 작가가 제시한 공간 속에서 관객들은 잊었던 것들 혹은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한다. 그렇게 김동희 작가가 제시한 공간은 가능성의 공간이 되고 사람들은 이곳에 모인다.


건물로 가득 찬 홍대 일대에 사람들이 멈추어서거나 모일 곳은 없었다. 홍대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 속의 사람들도 건물처럼 목적을 부여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목적 없는 사람은 잉여로 호명되며 사회에서 삭제된다. 개방된 공간 <나열된 계층의 집>은 모두가 모이는 공간이 되어, 빽빽한 세상 속의 틈이 된다. 평면의 계획도가 남은 자리에서 우리는 각자 하나의 가능성이 되어 크고 작은 높낮이를 만들어낸다. ■




* 사진출처 _ <나열된 계층의 집> 페이스북 페이지 / 프로그램북 캡쳐(지도) /  개인촬영 컷 


원문 http://indienbob.tistory.com/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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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

RIGHT NOW, WRONG THEN 
7.6
감독
홍상수
출연
정재영, 김민희, 윤여정, 기주봉, 최화정
정보
드라마 | 한국 | 121 분 | 2015-09-24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저자
전경린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1997-02-2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심장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소설! 파멸조차 통과하는 질기디 질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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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저자
김훈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7-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수상작가 김훈 첫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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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틀리고그때는맞든, 상관없다. 솔직한다 한들 찌질함과 병신같음이 어디 가겠나.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어디든 정신을 팔아야 지낼 수 있었던 추석이었기에 집어든 책이었다. 물론 이 책에는 병신같음은 없고 진지함이 있다. 글쎄 그렇지만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바라보는 그리고 풀어내는 태도의 차이는 결정적인걸 알면서도 이렇게는죽고사는문제저렇게는가벼운농담이되는것이다. 이념이라는 대의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을 버리고 동시에 그 대의가 낳는 고통의 일면으로 다른 여자와 살아야 하는 남자. 그 남자와 사랑하는 삶을 기다리는 여자. 네네, 그 얼마나 아련하고 숭고한 사랑입니까, 더군다나 삶의 의지 제로인 내게 결국 그 의지로 끝나는 결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었다.


뒤틀린 채로 책일기를 끝마치고 죽은 듯 연휴를 지낼 때 그제서야 책 생각이 났었다. 삶의 의지에 대한 주창이 다가온 것은 아니였다. 오히려 죽음의 부분이 다가왔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다시 잠에 들고 잠시 깨어있는 시간 속에서도 휘청거리는 나는 살아있지 않구나 싶었다.  책 속에서 이상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개별자가 할 수 있는 변화들, 손 끝으로 재료를 다듬으며 느끼는 생의 감각, 단순노동에서 오는 깨어있음. 이 모든 것들 우습게도 나또한 긍정했던 것이다. 어쩌겠어 삶의 의지가 집어치우고 싶은 잔소리처럼 들리더라도 죽음의 영역에서 돌아오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햇살처럼 아주 간단한 주문들. 높게 치달을 때 들리는 그네의 삐그덕 소리.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가 삶의 의지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죽음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좋았던 책은 아니었다. 전경린을 여성주의 작가로 칭하던게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다른 여성작가들은 어땠지 돌이켜보게했던건, 여성의 기다림이 놓인 자리였다.  큰 목표를 두었기에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남자를 기다리는 여성의 위치는 남성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에서는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수동적인 위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주인공을 갈망하던 부장과 섹스를 했을 때도 그건 부장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부장과의 관계의 시작은 남성의 호혜였지만 결국 이룬 마주함은 둘 모두에게 감각을 일깨우기 위한 장치로서 작동했다.  여기에 남주인공의 존재가 죄책감의 기제로서 작동할 필요는 없다. 나는 너를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기 위해 살아가는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존재가 필요하니까.  기다림을 수동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기다림는 행위가 너에 달린 것이 아니고 내게 달린 일이다. 여기에 기다림이 끝났다라는 종결은 중요하지 않다.


*확실히 이 두 지점-삶의 의지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건 결국 죽음이라는 점, 기다림이 삶을 만든다는 점-들은 전경린 여성이 만들었다고 생각든다. 니체나 토마스 만의 글은 내가 스스로 발을 딛고 살아갈 수 있을 때 도움이 되지만 이 책을 읽었을 때에는 적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다림의 경험은 <사랑의 단상>의 사례를 들어서처럼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많은 소설에서 이 기다림의 영역이 누구의 몫이었나를 떠올려보면 여성 작가 전경린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단순한 열정>에서의 기다림도 좋은 참조거리.



<강산무진>

홍상수 영화 이야기를 한다면서 애먼데를 다녀왔다. 되돌아기 위해 거쳐야할 지점인 <강산무진>으로 돌아오자면,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를 읽고 바로 편 책이 이 책이었다. 앞 쪽 단편 두개만 읽고도 정이 떨어졌다. (물론 그 이후  더 읽는 중이긴하다만) 아니 대체 왜 상처받은 남성은 여성을 안아야만 합니까. 당신들의 상처는 알겠어요. 오줌발 서지 않는 중년 남성의 고통은 흡연구역을 찾아 해매는 제가 아주 감히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다만, 그 치유를 성적 대상에서 찾는 점 동시에 그 아련해보이는 고통으로 인해 성적 치부는 용서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게 노년이든 청년이든 간에. 그리고 '자연의 이치처럼' 당신에게 품을 벌려준/ 당신의 영업을 위해 안겨야 했던/ 병들어 죽어가며 그 모습이 남편인 당신에게까지 수치스러웠던/ 그런 아내를 간병하는 당신에게 상상 속에서나마 삶의 희망이 되어주었던 여자들의 삶은 어디에 갔습니까. 그니까 말하자면 결국 당신의 삶을 유지시켜 주었지만 마치 당신에 의해 운명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여자들의 삶이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찌질함이니 병신같음이니 뭐라 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고마웠다. 맞건틀리건 보여주어서. 물론 처음에는 짜증나기도 했다. 과장되어 그려지기는 하지만 인물들이 하는 사랑은 결국 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나 바보같은 공식인가, 말(유려하던 서툰척 하던 한 구석 차지하고 있는 말들), 어쭙잖은 감수성 한 방울, 여기에 남자 여자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완성. 물론 술이 강한 촉매재가 되기는 하지만 없어도 된다. 도달점 없이 지칭으로 돌고 도는 홍상수표 대사처럼 감정은 관계는 우스꽝스럽게 이리저리 돌아댄다. 그게 싫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 흐름에 휘말렸던 게 바보 같았다. 바보 같은걸 싫어하면 난 다신 저런 감정 마주할 수 없을까 생각할 때 즈음 두 번 째 루틴이 시작되었다.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피식 웃으며 영화를 보았다. <강산무진>은 사랑이며 인생이며 하는 것들을 저 위에 올려놓았기에 아래 남겨지는 읽는 사람은 무력하게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농담거리로 바닥에 던져놓는다. 다시 낼름 주워 먹기 쉽게. 몸 두 개가 만나 서로 반응하는데 그건 거스를 수 없을뿐더러 애석하게도 우리 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걸 부정하면 삶을 부정하게 된다. 맞건 틀리건 우린 또 그렇게 살 것이다. 실은 휘말린 적 없다. 시답잖은 미세한 말들과 몸짓들 우리가 만든 거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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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도 느꼈듯이 <Dido & Aeneas>는 수업시간 동안 감상했던 작품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먼저 발레와의 유사점이다. 안무에서는 공간 전체가 아니라 정면성만을 염두한 움직임들이 있었고, 군무들은 발레가 추구했던 균형 잡힌 대칭을 맞추었다. 발레처럼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 아니라 오페라로 만들어진 음악이기는 했지만, 안무의 카운트와 음악과 딱딱 맞아떨dj졌다. 이런 점들에서는 가능성의 여지보다는 발레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질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작업들과 <Dido & Aeneas>에서 느끼는 이질감은 이 작품과 발레와의 유사점뿐만 아니라 모던댄스와의 유사점에서도 보였다. 아름다움을 위한 발레에 저항했던 모던댄스에서 춤은 기교가 아니라 신체의 표현수단이었다. <Dido & Aeneas>는 발레와 닮은 면이 있지만 동시에 이에 발레의 아름다움과는 맞지 않고 오히려 강인한 힘을 담은 동작, 중력의 현시 등이 있어서 모던댄스라는 측면이 눈에 띄었다. 올곧고 부드러운 자세뿐만 아니라 팔을 굽히는 등 몸을 왜곡하는 자세들이 있었다. 또한 지면을 전면적으로 사용하거나 강하게 뛰어내리며 중력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안무들도 많았다. 


     이 작품이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보였던 가장 큰 지점은 오늘날의 많은 작업들처럼 신체성을 나타내느냐였다. <Körper>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육체’를 주제로 삼았고 안무들은 모두 무대 위 현존하는 육체를 탐구했다. <Enter Achilles>와 <The metamorphosis>는 스토리가 있기는 하지만, 안무들이 스토리 전달에 목적이 있기보다는 신체성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Enter Achilles>에서는 신체의 접촉면이 빚어내는 동작이 눈에 띄었고, <The metamorphosis>에서는 무용수 한 명의 모든 근육이 인간 실존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었다. 동시에 작품이 고민하는 바가 신체성을 탐구하는 안무와 멀리 있지 않았다. 남성성에 대한 고민은 안무가 보여주는 강한 충돌 혹은 그와 대비되는 접촉에서 나타났고, 인간 실존에 대한 고민은 기괴하게 비트는 근육에서부터 스며 나왔다. 


     반면 이번 작품 <Dido & Aeneas>의 무용에서는 신체성이 우선되기보다는 표현수단에 머물렀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동작이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띄게는 마임이 많았다. 영웅, 아름다움, 운명 등 주인공이나 스토리에서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는 개념들이 모두 마임으로 표현되었기에 그만큼 작품에서 많이 등장했다. 마임뿐만 아니라 출항을 준비하는 동작 등 의미와 연결되는 동작들도 많았다. 의미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데 치중하는 이런 동작들로 인해 신체성이 만들어내는 흐름이 자주 끊겼고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동작에서 뜻을 읽으려는 노력이 내체화되었다. 그만큼 동작들은 모두 의미를 담고 있고 이 의미는 내용상 뿐만 아니라 감정 또한 품고 있었다. 극의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물론 노래의 선율과 가사가 알려주기도 했지만, 안무만 보더라도 충분히 느껴질 수 있는 사랑 앞에서의 망설임, 환희, 슬픔 등이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표정까지 감정을 표출하고 있어서 극이 갖는 연극적인 면모가 <Dido & Aeneas>에서는 강하게 드러났다. 

     형식과 의미 전달 상의 여지 없음은 신화에서 오페라로, 오페라에서 무용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 변화의 흐름에 충실하려 했던 결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는 신화부터 시작된 스토리를 우선으로 하여 이를 온전하게 담아내고 있다. 직접 성악가들을 작품에 등장시킨 만큼 강조되었던 음악의 측면에서 보면 안무의 카운트는 이 음악을 따르고 있었다. 음악은 박자를 지시하는 역할에서 나아가 안무의 의미를 지시했다. 선율과 가사에서 느껴지는 상황과 감정이 그대로 음악에 동반하는 안무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렇듯 <Dido & Aeneas>에서 신화 스토리와 오페라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에서 이 작품이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 전달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다. 오페라는 목소리가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스토리를 쉽게 알려주면서 여기서 느낄 수 있는 정서를 극대화시킨다. 물론 정서 전달에는 안무 또한 큰 역할을 했다. 여성 역할을 맡은 남성 안무가 Mark Morris는 강인한 움직임 속 절제된 표현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Dido의 감정을 유려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아주 확실하게 여지를 열어둔 지점이 있었다. 이 지점은 오히려 앞서 살펴본 <Dido & Aeneas>가 지닌 견고함을 흔들어놓는다. 그건 바로 이야기의 태초부터 여성으로 설정된 Dido의 역할을 남성 무용수인 Mark Morris가 맡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상황과 감정으로의 몰입에서 관객들을 떼어놓는다. 관객들이 극적으로 빠져들게 되는 성행위나 자위 장면에서 성별의 교란은 관객이 작품에서 물러나게 한다. 작품 전체는 이처럼 관객들을 고정시키면서도 흔들어놓는 애매함이 나타나는데, 이는 주인공에서 성별의 혼돈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Mark Morris는 여주인공뿐만 아니라 그녀를 고통으로 떠미는 악한 마녀의 역할도 담당한다. 그녀의 역할 변경과 함께 다른 안무가들의 역할도 선과 악을 뛰어넘는다. 심지어 의상마저도 치마와 바지로 그 역할을 오고간다. 이렇듯 전반적으로 <Dido & Aeneas>는 규정지을 수 없는 정체성들을 무대 위에 뛰어놓는다. 


     부유하는 정체성의 레이어들을 살펴보자. 먼저 여주인공을 남성 무용수가 추는데 그는 동시에 여성 무용수와 적대되는 또다른 여성을 맡는다. 이 두 여성은 작품에서 여러 방식으로 대비되어 표현된다. 가장 쉬운 구조로 이 둘에게는 각각 두 명의 심복이 있어서 관객들은 이 대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안무에서도 대비는 나타나는데 Dido 역할을 할 때는 주로 서있는 동작이 많은 반면, 여자 마법사 역할을 할 때는 지면을 주로 사용하는 것이 눈에 띈다. 또다른 차이점은 감정의 표현이었다. 무엇보다도 마법사일 때는 성적인 분위기로 흘러넘치며 경박스러울 정도로 감정 표현이 직접적이다. 이는 얼굴표정에서도 드러나지만 안무에서도 드러나는데 마녀 캐릭터일 때는 정신없이 돈다든지 팔다리를 매우 빠르게 움직인다. 그렇다면 비극적인 사랑의 운명에 빠진 여왕 Dido의 감정표현을 어떨까. 그녀의 감정은 마녀의 흘러넘치는 감정표현과 대비되어 절제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극 중 Dido는 사랑하는 Aeneas가 떠난다는 사실에 죽을 만큼 슬퍼하면서도 그가 내린 결정을 그보다도 더 확고하게 수행한다. 흔들린 Aeneas가 그녀를 찾지만 되돌리는 몸짓에서 Dido는 손을 부드럽게 뻗으면서도 그 속에는 단호함이 담겨있다. 그녀의 안무의 선에는 확신으로 가득찬 힘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강인함이 곧 감정의 메마름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Mark Morris가 보여주는 선에는 확고한 슬픔이 들어가 있기에, Dido가 이미 빠져버려 되돌릴 수 없는 사랑의 비극과 그녀의 결연함이 보는 사람에게 깊게 박힌다. 이러한 감정표현의 차이는 두러 인물의 캐릭터와도 관련 있다. 여자 마법사는 다른 사람의 슬픔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소비하는데 이는 마스터베이션에서 느끼는 휘발성의 쾌락일 뿐이다. 반면 Dido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현명한 군주이자 자신을 휩싸는 사랑의 감정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인물이다. 


     Dido를 남자 주인공 Aeneas와 비교하여 살펴보면 그야말로 자신의 감정에 확신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인물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비극적이며 누구에게나 슬픔으로 다가온다. <Dido & Aeneas>에서는 흔히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성별로 알려진 남성이 갈팡질팡하는 반면 감성적인 유약한 존재로 여겨지는 여성이 슬픔마저도 포괄하는 흔들림 없는 결단을 보여준다. Dido와 Aeneas 사이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성역할과 다른 면모는 무용가의 외적 형상에서 그리고 그 안무에서도 드러난다. 먼저 Aeneas보다 Dido의 체격이 크기 때문에 남성이 여성을 감싸고 보호하는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다. 동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Dido는 동작 하나하나에는 몸 끝까지 힘이 담겨 있다.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육중한 몸의 남자 무용수가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애초의 이 신화는 규정된 기준을 넘나드는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Mark Morris가 Dido 역을 맡은 것은 그 넘나듦을 한 번 더 뒤집어서 보여준 것뿐이다. 이런 식의 정체성의 끊임없는 반전은 선한 인물들과 악한 인물들 즉 선악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역할 부여에서도 보인다. 신화 속 Dido에게 <Dido & Aeneas> 속 Mark Morris에게, 이미 정해진 것이란 없다. 이분법 체계 속에서 부여된 성격, 역할 등 모든 것을 두 인물은 서사를 통해서 몸짓을 통해 뒤집어가며 보여준다. 이 점에서 <Dido & Aeneas>가 그토록 충실하게 여지를 닫아놓으려 했던 시도는 오히려 가능성을 극도로 확대하려는 시도일지도 모른다. 견고하게 쌓여있는 것이 실은 균열로 이루어져있음을 알게 될 때 그 허상은 무너질 수 있게 된다.  








신체성이 드러나는 무용아니면 별 흥미를 갖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스토리 전달이 위주인 작품들에는 무용일는 장르와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Dido & Aeneas>를 보면 무언가 전달하는 움직임 그 자체, 그러니까 의미를 포함한 움직임지라도 깊은 곳까지 엄습하는 사로잡힘이 있었다. 특히 남성의 강한 신체가 감정을 전달할 때, 그 감정은 강인하지만 그렇기에 더 사무친다는 것을 Mark Morris의 몸에서 볼 수 있었다. 

' 극 중 Dido는 사랑하는 Aeneas가 떠난다는 사실에 죽을 만큼 슬퍼하면서도 그가 내린 결정을 그보다도 더 확고하게 수행한다. 흔들린 Aeneas를 되돌리는 몸짓에서 Dido는 손을 부드럽게 뻗으면서도 그 속에는 단호함이 담겨있다. 그녀의 안무 선에는 확신으로 가득찬 힘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강인함이 곧 감정의 메마름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Mark Morris가 보여주는 선에는 확고한 슬픔이 들어가 있기에, Dido가 이미 빠져버려 되돌릴 수 없는 사랑의 비극과 그녀의 결연함이 보는 사람에게 깊게 박힌다.'

의도치도 않은 성격의 작품에서 이번 학기 중 가장 좋아하는 안무가가 나온 것 같다. 나이를 먹은 후 인터뷰를 보는데 호방함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젊을 때 사진에서는 눈에서 느껴지는 애수에도 빠져들었다. 허허 이 아저씨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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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Pita, <The metamorphosis>


<The metamorphosis>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원작으로 한다. 과제를 작성하는 오늘은 6월 3일인데 포털사이트 메인에 오늘이 카프카가 타계한 날임을 알린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으로 <변신>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읽히고 사랑받는 이 소설이 무용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작품에 앞서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벌레로의 변신은 어떻게 표현할까부터 무엇보다 벌레가 된 당혹감과 벌레로서의 삶에서 오는 좌절감 등 벌레로서의 표현은 무엇일까라는 기대가 있었다. 소설 원작의 <변신>이 공연예술로서의 무용으로 나왔을 때 그리고 Arthur Pita의 연출로 나왔을 때, 스토리는 같지만 소설과는 많은 것들이 다르게 느껴졌다. 

     공연예술인 무용에는 소설과 달리 많은 제약이 있다. 소설의 시간과 공간은 무한한 반면 무대는 한정되어있고 정해진 약속들로 소통 가능한 언어 대신 불확실한 몸짓이 있다. 그렇기에 무용이란 공연예술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주어진 조건들을 유려하게 활용해야 한다. 이 점에서 <The metamorphosis>는 절제되어 간결하지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걸 가장 먼저 느꼈던 점은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가 벌레로 변했음이 나타나기 직전이다. 전날까지 잠자는 자명종 소리에 깨 식탁 위의 사과를 가져가고 길가에서 커피를 사 마시고 기차역에서 외판하고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거로 아침을 시작한다. 공연에는 삼일이라는 시간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한정된 공연 시간에서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게 잠자 인생 전부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잠자가 벌레로 변한 그날 아침 자명종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울린다. 커피 호객 소리도 기차 소리도 한참을 울려 퍼지다 지나간다. 그 짧은 연달은 소리들로 관객은 잠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궁금했던 벌레로의 변신도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끈적한 벌레의 진액으로 충격적인 모습은 갖추어졌고, 공중에서 아등바등하다 이내 다시 꼬이는 팔과 다리들은 갑자기 늘어난 다리를 어쩔 줄 몰라하는 잠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간구성에서도 절제된 표현들이 많은 것을 암시했다. 트여 있는 하나의 공간이지만 조명의 사용에 따라 잠자의 방, 거실, 길거리, 기차 역이 오갔다. 공간구성은 잠자의 내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공연 중간에 잠자 방의 벽이 기울어졌다가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간다. 벽의 기울음은 기어 다니기에 적합한 환경이기도 하고 많은 의미를 투영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잠자의 시선으로 그러니까 벌레의 시선으로 본 벌레의 세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그 자세가 편하고, 신선한 음식이 아니라 썩은 음식밖에 먹을 수 없게 된 것처럼 잠자의 세계는 달라졌다.

방바닥 위에 납작하게 엎드려 이는 이방, 천장이 높은 텅 빈 방은 그를 묘하게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5다년 동안이나 살아온 자신의 방이 아닌가?

동생이 오빠를 위한 마음에 음악을 틀어주며 춤을 추는 장면에서 벽이 기울어진다. 이때 동생의 춤은 잠자가 벗어날 수 없는 지면에서 이루어진다. 가상의 벽을 사이에 두고 잠자 역의 무용수도 잠자의 여동생 역의 무용수도 동일한 지면에서 몸을 움직인다. 그러나 잠자의 움직임은 고통스럽고 슬픈 벌레의 움직임인 반면 동생의 움직임은 애정을 담은 어여쁜 몸짓이다.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확연환 대비로 잠자는 벌레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반면 기울어졌던 벽이 다시 서는 장면은 자신을 사랑했던 여동생이 마음을 돌리고 화를 퍼붓는 장면이다. 이후 잠자는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벌레로서의 잠자의 삶이 끝이 나면서 혼란으로 가득 찼던 벌레의 세상도 끝이 나게 된다. 

     무용 장르의 매개체인 몸을 통해서도 간결게 하지만 잠자의 상황을 깊게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무용수의 몸짓에 따라 보는 사람들도 잠자가 벌레의 삶을 살게 되는 과정을 같이 할 수 있었다. 변신한 아침에서 깨어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스러움은 기괴하게 꺾이고 꼬이는 손과 다리를 지나 발바닥과 발가락에서까지 나타났다. 이후 철봉에 손과 발들을 가져다 놓았다가 떼는 동작이 반복되는데, 거기서는 잠자가 벌레로서의 삶의 양식에 눈을 뜨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물론 잠자가 인간 존재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검은 진액을 온몸에 진하게 칠한 무용수 둘이 등장하는데 그들과 잠자가 보여주는 안무는 잠자의 내면과 잠자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 동작 이전부터도 잠자는 일어서려 시도한다. 배를 땅과 마주한 채로 살아가는 벌레의 자세와 달리 직립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의미한다. 진액으로 뒤덮인 두 명의 배우는 검고 끈적한 진액만큼이나 더 기이하고 땅에 달라붙는 몸짓을 보여준다. 그러나 잠자는 그들과 달리 직립을 시도하고 결국 서지만 이내 다시 두 명의 다른 잠자의 모습으로 인해 좌절된다. 중간중간 일어서려 시도하는 모습처럼 잠자는 인간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누가 인간답게 살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두 명의 또 다른 잠자는 그렇게 벌레로서의 삶으로 내던지게 된 상황 그리고 벌레로서의 존재로 잠자를 체념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용의 매개체인 몸과 그 움직임은 카프카 소설 <변신>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벌레가 된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상황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무용 작품 <The metamorphosis>에서 주인공 잠자가 갖고 있는 것은 몸뿐이다. 그는 온몸을 다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당혹스러움, 고통, 슬픔, 체념 이 모든 것이 잠자가 존재하는 단 하나의 원천 즉 몸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물론 <The metamorphosis> 전반적인 연출에서 마임 동작이 많이 등장하는 등 연극적인 성격이 강한 만큼 소설과 달리 감정 표현도 강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벌레로서의 세상밖에 볼 수 없고 벌레로만 바라보아지는 삶을 살게 된, 그리고 남은 것은 육신밖에 남지 않은 존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그 온몸으로의 감정표현이다. 

     무용의 몸짓뿐만 아니라 Arthur Pita의 연출에서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지점들을 읽어낼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잠자를 둘러싼 가족의 상황을 펼쳐서 제시했다는 점이다.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지만 잠자의 내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는 갑작스러운 비극을 맞이한 잠자에 이입하며 그 불행에 동감하면서 가족의 매정함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벌레가 된 잠자의 내면을 이야기하는 데서 나아가 그를 둘러싼 상황을 펼쳐낸다. 먼저 벌레가 만들어내는 진액은 온 방 안을 더럽히고 이내 거실까지 침범한다. 잠자의 방과 가족의 공간이 사면으로 펼쳐져 있기에 관객은 변신이 잠자 삶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진액과 함께 퍼지는 벌레의 혐오스러움은 실제 공연에서 냄새가 점점 더 독하게 퍼져나갔던 것처럼 지울 수 없이 가족들의 삶에 퍼져나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Arthur Pita의 <The metamorphosis>가 카프카의 소설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살펴보고 그 마지막으로 가족이 가족을 혐오할 수 없게 되는 상황과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된 관객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가족들이 혐오해 마지 않는 잠자의 변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카프카의 소설에서 벌레라고 번역된 단어는 Ungeziefer이며, 여기에는 해충이라는 의미 말고도 불결하고 손대기 기피하는 의미도 담겨있다고 한다. 주인공 무용수의 기괴한 몸짓을 보면서 장애인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그 몸은 스스로에게도 낯설 뿐이다. 또한 방에서만 지내는 잠자의 생활에서 며칠 전에 본 연극 속 히키코모리가 생각났다. 감독 -는 스스로 히키코모리였는데 그는 히키코모리 자체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며 ~라고 말한다. 장애인과 히키코모리 모두 우리 사회에서는 Ungeziefer처럼 인식된다. 이들의 모습은 일반적인 생활 바깥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그들 자체의 모습이 안정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 밖에 있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배척당한다. 이들을 배척하는 외부는 앞서 살펴본 검은 진액으로 뒤덮인 잠자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것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잠자를 벌레의 삶으로 끌어내리는 규정과 시선의 몸짓이었다. 

     일상이 반복되는 작품의 초반 장면에서 단 두 수저만을 먹는 잠자에게서 나는 인간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먹는 행위를 동물적인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 될 수 있다. 먹는 행위는 생존에 필수적이기에 우리는 삶을 즐기려 먹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일상 장면에서 잠자는 그저 돈을 버는 가장이자 사회의 구성원이었고 식사 행위마저도 그 역할을 위한 것이었다. 벌레로 변신한 잠자가 인간답지 못한 삶으로 바라보아진다면, 잠자 사회 역할 일부로서만 존재하던 잠자의 모습은 인간다운 삶이었을까. 카프카의 <변신>이 글로 인간 실존을 탐구했던 것처럼 Arthur Pita의 <The metamorphosis>는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몸을 가지고 실존을 묻는다. 








Frank Moon의 음악도 좋고

무엇보다 안무가 Edward Watson, 아아 저 근육들을 봐라... 

감독인 Arthur Pita는 이 작업을 만들 때부터 Edward Watson을 염두하고 그와 함게 무용을 짰다고 한다. 

좀더 세밀하게 보자면 그가 쓸 수 있는 몸들을 확인했던거겠지. 

발가락 근육 하나하나 움직이는 표현을 보면 감탄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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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sha Waltz, <Körper>


Körper라는 독일어 단어는 몸을 의미한다. 그런데 독일어에는 몸을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 Leib도 있다. 두 단어는 모두 몸을 지칭하지만 개념은 상이하다. Körper는 인간 육체를 생리학적 유기체로서 이해한다. 즉 쪼개고 분해해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바라본다. 반면 Leib는 Körper가 아우르지 못하는 주관적 느낌으로서의 몸을 의미한다. 무용의 측면에서 몸을 보았을 때 Körper라는 단어는 몸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거나 기교만을 보여주는 안무에 적합할 것 같다. 이러한 무용에서 관객들은 무용수들의 몸을 대상화하여 관찰하는데 머물기 때문이다. 반면 무용수의 몸짓 그 자체가 관객과 무용수가 함께 자리하는 공간 속에서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할 때는 Leib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 것이다. <Körper>는 명확하지 않지만 현존하는 인간 신체들이 만나 무엇인가를 나눈다. 여기에는 무용수들의 몸만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 함께 하는 관객들의 몸도 있다. 오히려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관객이 무용수의 신체를 대상화할 수 없고 끊임없이 그 몸짓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Leib이 아닌 Körper를 제목으로 내걸고 있다. 

    물론 <Körper>에는 Körper로써의 몸을 볼 수 있는 장면들이 들어가 있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피부 표면에 장기를 그리고 장기마다의 가격을 외치는 장면이다. 여기서 두 명의 여성 무용수의 존재는 상품화될 수 있는 장기로만 보인다. 옆의 남자 무용수도 마찬가지이다. 장기를 끄집어내는 듯한 동작에 보는 사람은 경악하게 되는데, 무용수는 보이지 않고 그 빨간 장기들만이 잔상에 남는다. 살가죽을 꼬집어 갈고리처럼 들어 올리는 장면이나 물건처럼 들어 치수를 재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몸은 그 자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게를 재고 길이를 측정하는 등 기준에 따라 수치화할 수 있는 요소로 등장한다. 개별 육체가 아니라 육체 집단이 나타나는 경우에도 Körper로써의 몸을 볼 수 있다. 무대 중앙의 벽이 쓰러진 다음 장면에서 사람들의 육체는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굴러다니다가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진다. 많은 몸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개별을 살펴볼 수 없다. 그저 뭉뚱그려진 살덩어리가 있기에 언제든지 쪼개고 합칠 수 있다. 이후 장면에서는 일련의 신체가 하나의 시계 바늘이 되어 박자를 맞추어 걷다가 이후 스러져 눕혀진 직사각형의 벽면을 걸어 다닌다. 여기서도 시계 장치처럼 동일한 행위를 일정한 박자에 맞추어 일률적으로 움직인다. 컨베이 벨트 위의 대상과 볼트를 조이는 사람의 모습 모두가 무용수의 움직임에 한데 들어가 있다. 이때 장면의 사운드 또한 철컹철컹 거리는 기계 소리이다. 

     그런데 측정할 수 있는 요소들로 쪼개진 몸들은 다시 재구성되기도 한다. 장기의 가격을 부르던 장면 이후 같은 무용수들과 옆의 남자 무용수 둘은 물이 담긴 병을 신체에 부대낀다. 우리 몸에서 물이 나오는 부위는 일반적으로 눈, 코, 입 그리고 하체의 요도 등이다. 여성 무용수들의 어떤 움직임에서는 서서 소변을 보는 것 같은 장면이 보이기도 하나, 신체가 꺾이고 뒤집히고 섞이면서 다른 움직임들에서는 팔꿈치 등의 액체가 나오지 않아야 할 부위에서 물이 흐른다. 인체의 기관은 위치와 기능으로 규정되는데 이 기관들이 재조합되는 것이다. 신체 각 부위의 해체와 재구성은 무용수들의 독백에서 가장 눈에 띄인다. 무용수들은 신체 부의의 기표를 외치는데 동시에 사회적으로 동의된 기의와는 다른 곳을 가르킨다. 이로써 무용수의 몸은 각 부위부위 별로 쪼개어지지만 흩어진 상태가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재구성이 가능해진다.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육체는 Körper에서 Leib으로 옮겨갈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Körper에서의 해체가 대상화를 위한 파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내제되있던 규정진을 깨는 낯섦으로 재구성될 때 나와는 다른 몸을 가진 상대와 마주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결합에서 몸들이 그 자체로서 현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Körper>에는 한 성별의 상체에 다른 성별의 하체가 앞뒤가 뒤바 뀐채로 연결되어 나오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신체는 성별과 부위에 따라 해체되었다가 재조합되었지만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제스처와 표정은 어긋난 결합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런 재구성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척추가 으스러지는 것처럼 언제든지 다시 산산조각 날 수 있는 임시적인 접합일 뿐이다. 한편  <Körper>에는 대상화에 적합했던 몸들이 요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보이는 만남도 등장한다. 앞서 살펴보았던 몸들이 기계가 되었던 장면 다음에 여성 무용수와 남성 무용수 파트너들의 접촉 안무가 이어진다. 건장한 남성과 왜소한 여성의 접촉에서 남성 무용수는 여성 무용수의 머리를 발로 돌리기도 하는데, 상대방이 어떻게 되든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써 손에 넣으려 한다. 그런데 처음으로 등장하는 커플은 쪼개어지느라 상처 난 서로의 몸들을 보듬어 준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여성의 몸을 남성이 안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잡아 들어 올려준다. 이 둘의 접촉에서는 각자의 감정을 이해하면서 그걸 나누려는 모습이 보인다.


해체와 재구성이 반복되는 이 작업에서 Körper와 Leib으로써의 몸을 둘 다 확인했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의 제목은 Körper로 남게 되었을까? 그 답을 무용수들의 독백 장면에서 어렴풋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녀에게 내 몸을 다 보여주고 싶었어, 나랑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모든 것을.”

“나는 내 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태어났어요.”

처음 대사처럼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지점들이다. 그리고 두 번째 대사처럼 그 구별되는 차이들을 가지고 우리 모두는 태어났다. Körper로써 대상화된 몸을 바라보는 것은 보는 자의 기준에 따라 재단하는 위험성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즉 그 만의 신체가 다른 신체들과 다른 지점들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무용수들을 알몸과도 같게 만드는 의상은 인물들의 차이를 없앤다. 그러나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알몸은 개별자의 존재를 만드는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차이를 타고났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우리 몸 그 자체는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Körper>에서는 대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화하는데, 그들을 마치 자신은 옷 밑에 그런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듯 타고난 차이를 모두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대를 대상화할 수 있는 근거로만 바라본다. 

     여기서 시선의 문제가 등장한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Körper>에서의 시선은 단지 시지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첫 장면에서 유리벽 속 꿈틀거리는 육체들을 한 무용수가 바라보는데 한쪽 손으로 눈을 가린 대신 다른 한쪽 손에는 눈의 물성을 지닌 흰 공들을 들고 있다. 이런 암시뿐만 아니라 몸이 사람 간의 매개물이 되는 무용에서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관계를 맺는 시선은 몸 전체를 아우른다. 접촉에서 각 신체 접촉면으로 상대를 의식하듯 몸을 통해 서로를 마주한다. 직접 살을 닿지 않아도 전면적인 시선은 가능하다. <Körper> 속에서 권역이 강조되듯 인간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을 아우르는 권역 속에서 이루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둘러싸는 공간 속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Körper>가 반복해서 제시하는 해체와 재구성은 결국 서로 다른 신체와 그 신체 자체로 이루어진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묻는다. 같은 신체를 타고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의 신체는 규정된 기준으로 소급시키는 시선으로 해체되어 바라보아질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 지점들이 하나의 온전한 몸을 구성하는 시선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해체된 신체를 어떻게 재구성하느냐는 관계 맺음으로 이어진다.      <Körper>에는 속옷 입은 남자가 숨을 가파르게 내쉬며 일어나려 시도하지만 지면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옆의 다른 남성 무용수는 그저 가만히 서 있는 장면이 있다. 많은 경우에는 이렇게 관계 맺음을 포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Körper>는 관계 맺음을 지속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여자와 남자가 서 있다. 영상 속 카메라는 여성의 뒷모습과 남성의 앞모습을 담는데, 처음에는 남성의 얼굴에 여성의느 몸이 비치고, 남자가 옷을 뒤집어썼을 때는 남자의 모습에 여성의 얼굴이 비친다. 신체 부위의 기의와 기표가 뒤섞여 새로움 바라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처럼, 나와는 다른 사람의 차이를 만날 때 우리는 그 차이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가 있다. 나의 신체로써 살아가는 게 익숙한 삶에서 다른 사람의 신체를 받아들이는 일은 지난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차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계는 계속해서 재구축될 수 있다. 이때 비로소 신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4voJ9BDj6w&list=PLaMG6lrvdNmWOBRI7vFClclTd0luOZy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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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8 Physical Theatre, <Enter Achilles>


‘쟁기’라는 가게 이름, 펍, 축구공 등 <Enter Achilles>는 남성을 상징하는 것들로 가득차있다. 등장하는 무용수들도 모두 남성들이다. 남성성을 떠올릴때는 흔히 그 대척점으로 여성성이 수반된다. 이 이분법은 중심과 주변부의 구분으로도 이어진다. 남성이 갖고 있는 특징들이 공동체 내에서 이상적으로 여겨지면서 남성성이 기준이 되고 이와 반대되는 여성성은 변두리로 물러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남성성을 떠올릴 때 그 내부를 들여다보기는 어렵다. 여성성과의 구분을 바탕으로 생겨났기에 구분점을 만드는 대표성이 먼저 나타나기 때문이다. 배경에 남성성으로 가득찬 <Enter Achilles>은 여성성과 남성성간의 대표성 싸움을 떠나 남성사회를 제시한다. 그 속에서 막연하게 기준으로만 여겨지던 남성성의 모습이 어떤지 살펴볼 수도 있고 그 애매모함을 목격하기도 한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남성들의 문화는 놀이와 폭력의 혼종이다. 신체 간의 강렬한 부딪침은 곧 놀이이다. 압박적인 신체 접촉이 감정 싸움으로 번지다가도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는다.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다. 정신적 폭력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사람이 놀림을 당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놀이이기에 이내 곧 피해자와 가해자는 순환된다. 이러한 폭력에 때로는 악의도 있지만 <Enter Achilles>가 보여주는 남성사회에는 폭력이 악의 이전에 놀이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는 강인함도 중요하다. 강인한 신체와 마음으로 공동체원들의 압박을 상처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이런 분위기를 바탕으로 좀 더 강안한 사람이 우두머리가 된다. 

이렇듯 <Enter Achilles>의 배경에는 남성성이 가득차있다. 그런데 여기 제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치명적인 약점요소들이 들어온다. 약점요소가 되는 것은 강인하고 그렇기에 규범이 되어온 남성성과는 거리가 있는 어떤 것들이다. 슈퍼맨 복장의 남자가 들어오면서 강인한 남성 사회에 금이 가기 시작하지만 이미 균열은 있었다.

작업 초반에 꽃무늬 셔츠 차림의 남자는 혼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빨강 색 셔츠를 입은 남자는 슈퍼맨이 들어와 처음 괴롭힘에 동참하지 않았다. 균열은 보스에게서도 보인다. 보스는 남성성을 바탕으로 견구하게 구축된 정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섹스돌과 사랑을 나눈다. 그것도 욕정의 아니라 애정의 상대로. 눈에 보이는 균열이 다가 아닐 것이다. 앞서 말한 놀이와 폭력의 혼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딪치는게 정말 세서 아플 수도 있고 나를 지나친 인사가 기억에 남을 수도 있고 놀림이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 펍의 인물들은 모두 쿨하게 넘어간다. 그러나 정말 모두가 괜찮았을까, 

    펍의 인물들만이 모순적인 것은 아니다. 슈퍼맨 복장을 남자 또한 갖은 모호함으로 가득차있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남성들에게 분노를 갖으면서도 끊임없이 그 무리에 드어가고 싶어한다. 정의와 힘의 상징인 슈퍼맨 복장을 입으며 영웅 히어로를 흉내내면서도 악행을 묵인하며 직접 범하기도 하다. 그가 받은 분노는 애꿎은 축구에게만 꽂힌다. 

     <Enter Achilles>는 남성성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남성성의 표상에 균열을 가한다. 남성성은 결코 단일한 것이 아니다. 집단으로서만 유희하는 펍의 남자들과 달리 슈퍼맨은 혼자서도 즐길 수 있는 법을 아는데, 이러한 그가 깨는 지점은 남성성보다는 단일함이다. 단일함이 깨진다면 아킬레스건은 더이상 약점이 아닐 수도 있다. 모두가 공유하는 지점이 아니라 개인의 공격지점으로 본다면 아킬레스건은 약점이 된다. 그러나 모든 존재를 개별자로본다면 아킬레스건은 누구나 갖고 있는 개별성이 될 수 있다. 

     상처받는 보스만 남기고 모두가 떠나는 장면으로 서사가 마무리되는 <Enter Achilles>는 상처주는 자는 상처받는 자를 이해할 수 없다는 슬픈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양자를 구별할 수 없으며 모두가 상처주는 자라는 회의적인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지만, 각자의 개별성과 함께 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 있다. 무용이라는 장르와 <Enter Achilles>가 택한 접촉 방식의 안무는 하나의 방안이 된다. 직접적인 신체성을 바탕으로 하는 무용은 대표성을 지닌 재현이 아니라 수행을 특징으로 한다. 그렇기에 <Enter Achilles>의 남성성은 하나의 고정된 규범으로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그 고정을 흐트리고 뒤섞었다. 접촉을 바탕으로 하는 안무는 흐트러지는 상황 속에서 존재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과 태도를 알려준다. 접촉은 혼자서는 가능하지 않다. 컵같은 사물일수도 있고 인물일수도 있고 어떤 대상의 다양한 면들을 경험하고 이해해야지만 몸짓이 가능하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완벽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해간다. 그럼에도 관계 맺을 수 있는 방식은 접촉 안무와도 비슷하다. 변화해가는 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신체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관계의 과정에서도 변화는 가능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안무는 슈퍼맨이 펍으로 두 번째 들어왔을 때 당하던 폭력을 마치 쎄쎄쎄 등과 같이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유하는 몸짓이었다. <Enter Achilles>는 남성성을 다루지만 그 속에 혼합된 모습은 남여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 작업에서는 차이를 기반으로 한 관계가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볼 수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PFR2OXf9i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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