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sha Waltz, <Körper>
Körper라는 독일어 단어는 몸을 의미한다. 그런데 독일어에는 몸을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 Leib도 있다. 두 단어는 모두 몸을 지칭하지만 개념은 상이하다. Körper는 인간 육체를 생리학적 유기체로서 이해한다. 즉 쪼개고 분해해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바라본다. 반면 Leib는 Körper가 아우르지 못하는 주관적 느낌으로서의 몸을 의미한다. 무용의 측면에서 몸을 보았을 때 Körper라는 단어는 몸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거나 기교만을 보여주는 안무에 적합할 것 같다. 이러한 무용에서 관객들은 무용수들의 몸을 대상화하여 관찰하는데 머물기 때문이다. 반면 무용수의 몸짓 그 자체가 관객과 무용수가 함께 자리하는 공간 속에서 관객에게 다가가고자 할 때는 Leib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할 것이다. <Körper>는 명확하지 않지만 현존하는 인간 신체들이 만나 무엇인가를 나눈다. 여기에는 무용수들의 몸만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 함께 하는 관객들의 몸도 있다. 오히려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관객이 무용수의 신체를 대상화할 수 없고 끊임없이 그 몸짓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도 이 작품은 Leib이 아닌 Körper를 제목으로 내걸고 있다.
물론 <Körper>에는 Körper로써의 몸을 볼 수 있는 장면들이 들어가 있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피부 표면에 장기를 그리고 장기마다의 가격을 외치는 장면이다. 여기서 두 명의 여성 무용수의 존재는 상품화될 수 있는 장기로만 보인다. 옆의 남자 무용수도 마찬가지이다. 장기를 끄집어내는 듯한 동작에 보는 사람은 경악하게 되는데, 무용수는 보이지 않고 그 빨간 장기들만이 잔상에 남는다. 살가죽을 꼬집어 갈고리처럼 들어 올리는 장면이나 물건처럼 들어 치수를 재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몸은 그 자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게를 재고 길이를 측정하는 등 기준에 따라 수치화할 수 있는 요소로 등장한다. 개별 육체가 아니라 육체 집단이 나타나는 경우에도 Körper로써의 몸을 볼 수 있다. 무대 중앙의 벽이 쓰러진 다음 장면에서 사람들의 육체는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굴러다니다가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진다. 많은 몸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개별을 살펴볼 수 없다. 그저 뭉뚱그려진 살덩어리가 있기에 언제든지 쪼개고 합칠 수 있다. 이후 장면에서는 일련의 신체가 하나의 시계 바늘이 되어 박자를 맞추어 걷다가 이후 스러져 눕혀진 직사각형의 벽면을 걸어 다닌다. 여기서도 시계 장치처럼 동일한 행위를 일정한 박자에 맞추어 일률적으로 움직인다. 컨베이 벨트 위의 대상과 볼트를 조이는 사람의 모습 모두가 무용수의 움직임에 한데 들어가 있다. 이때 장면의 사운드 또한 철컹철컹 거리는 기계 소리이다.
그런데 측정할 수 있는 요소들로 쪼개진 몸들은 다시 재구성되기도 한다. 장기의 가격을 부르던 장면 이후 같은 무용수들과 옆의 남자 무용수 둘은 물이 담긴 병을 신체에 부대낀다. 우리 몸에서 물이 나오는 부위는 일반적으로 눈, 코, 입 그리고 하체의 요도 등이다. 여성 무용수들의 어떤 움직임에서는 서서 소변을 보는 것 같은 장면이 보이기도 하나, 신체가 꺾이고 뒤집히고 섞이면서 다른 움직임들에서는 팔꿈치 등의 액체가 나오지 않아야 할 부위에서 물이 흐른다. 인체의 기관은 위치와 기능으로 규정되는데 이 기관들이 재조합되는 것이다. 신체 각 부위의 해체와 재구성은 무용수들의 독백에서 가장 눈에 띄인다. 무용수들은 신체 부의의 기표를 외치는데 동시에 사회적으로 동의된 기의와는 다른 곳을 가르킨다. 이로써 무용수의 몸은 각 부위부위 별로 쪼개어지지만 흩어진 상태가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재구성이 가능해진다.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육체는 Körper에서 Leib으로 옮겨갈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Körper에서의 해체가 대상화를 위한 파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내제되있던 규정진을 깨는 낯섦으로 재구성될 때 나와는 다른 몸을 가진 상대와 마주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결합에서 몸들이 그 자체로서 현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Körper>에는 한 성별의 상체에 다른 성별의 하체가 앞뒤가 뒤바 뀐채로 연결되어 나오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신체는 성별과 부위에 따라 해체되었다가 재조합되었지만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제스처와 표정은 어긋난 결합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런 재구성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척추가 으스러지는 것처럼 언제든지 다시 산산조각 날 수 있는 임시적인 접합일 뿐이다. 한편 <Körper>에는 대상화에 적합했던 몸들이 요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보이는 만남도 등장한다. 앞서 살펴보았던 몸들이 기계가 되었던 장면 다음에 여성 무용수와 남성 무용수 파트너들의 접촉 안무가 이어진다. 건장한 남성과 왜소한 여성의 접촉에서 남성 무용수는 여성 무용수의 머리를 발로 돌리기도 하는데, 상대방이 어떻게 되든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써 손에 넣으려 한다. 그런데 처음으로 등장하는 커플은 쪼개어지느라 상처 난 서로의 몸들을 보듬어 준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여성의 몸을 남성이 안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잡아 들어 올려준다. 이 둘의 접촉에서는 각자의 감정을 이해하면서 그걸 나누려는 모습이 보인다.
해체와 재구성이 반복되는 이 작업에서 Körper와 Leib으로써의 몸을 둘 다 확인했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의 제목은 Körper로 남게 되었을까? 그 답을 무용수들의 독백 장면에서 어렴풋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녀에게 내 몸을 다 보여주고 싶었어, 나랑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모든 것을.”
“나는 내 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태어났어요.”
처음 대사처럼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지점들이다. 그리고 두 번째 대사처럼 그 구별되는 차이들을 가지고 우리 모두는 태어났다. Körper로써 대상화된 몸을 바라보는 것은 보는 자의 기준에 따라 재단하는 위험성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즉 그 만의 신체가 다른 신체들과 다른 지점들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다. 무용수들을 알몸과도 같게 만드는 의상은 인물들의 차이를 없앤다. 그러나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알몸은 개별자의 존재를 만드는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차이를 타고났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우리 몸 그 자체는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Körper>에서는 대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화하는데, 그들을 마치 자신은 옷 밑에 그런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듯 타고난 차이를 모두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대를 대상화할 수 있는 근거로만 바라본다.
여기서 시선의 문제가 등장한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Körper>에서의 시선은 단지 시지각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첫 장면에서 유리벽 속 꿈틀거리는 육체들을 한 무용수가 바라보는데 한쪽 손으로 눈을 가린 대신 다른 한쪽 손에는 눈의 물성을 지닌 흰 공들을 들고 있다. 이런 암시뿐만 아니라 몸이 사람 간의 매개물이 되는 무용에서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관계를 맺는 시선은 몸 전체를 아우른다. 접촉에서 각 신체 접촉면으로 상대를 의식하듯 몸을 통해 서로를 마주한다. 직접 살을 닿지 않아도 전면적인 시선은 가능하다. <Körper> 속에서 권역이 강조되듯 인간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을 아우르는 권역 속에서 이루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둘러싸는 공간 속에서 서로를 바라본다.
<Körper>가 반복해서 제시하는 해체와 재구성은 결국 서로 다른 신체와 그 신체 자체로 이루어진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묻는다. 같은 신체를 타고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의 신체는 규정된 기준으로 소급시키는 시선으로 해체되어 바라보아질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 지점들이 하나의 온전한 몸을 구성하는 시선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해체된 신체를 어떻게 재구성하느냐는 관계 맺음으로 이어진다. <Körper>에는 속옷 입은 남자가 숨을 가파르게 내쉬며 일어나려 시도하지만 지면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옆의 다른 남성 무용수는 그저 가만히 서 있는 장면이 있다. 많은 경우에는 이렇게 관계 맺음을 포기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Körper>는 관계 맺음을 지속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여자와 남자가 서 있다. 영상 속 카메라는 여성의 뒷모습과 남성의 앞모습을 담는데, 처음에는 남성의 얼굴에 여성의느 몸이 비치고, 남자가 옷을 뒤집어썼을 때는 남자의 모습에 여성의 얼굴이 비친다. 신체 부위의 기의와 기표가 뒤섞여 새로움 바라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처럼, 나와는 다른 사람의 차이를 만날 때 우리는 그 차이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가 있다. 나의 신체로써 살아가는 게 익숙한 삶에서 다른 사람의 신체를 받아들이는 일은 지난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차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계는 계속해서 재구축될 수 있다. 이때 비로소 신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4voJ9BDj6w&list=PLaMG6lrvdNmWOBRI7vFClclTd0luOZyH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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