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hur Pita, <The metamorphosis>


<The metamorphosis>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원작으로 한다. 과제를 작성하는 오늘은 6월 3일인데 포털사이트 메인에 오늘이 카프카가 타계한 날임을 알린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으로 <변신>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읽히고 사랑받는 이 소설이 무용으로는 어떻게 보일지 작품에 앞서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벌레로의 변신은 어떻게 표현할까부터 무엇보다 벌레가 된 당혹감과 벌레로서의 삶에서 오는 좌절감 등 벌레로서의 표현은 무엇일까라는 기대가 있었다. 소설 원작의 <변신>이 공연예술로서의 무용으로 나왔을 때 그리고 Arthur Pita의 연출로 나왔을 때, 스토리는 같지만 소설과는 많은 것들이 다르게 느껴졌다. 

     공연예술인 무용에는 소설과 달리 많은 제약이 있다. 소설의 시간과 공간은 무한한 반면 무대는 한정되어있고 정해진 약속들로 소통 가능한 언어 대신 불확실한 몸짓이 있다. 그렇기에 무용이란 공연예술은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주어진 조건들을 유려하게 활용해야 한다. 이 점에서 <The metamorphosis>는 절제되어 간결하지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걸 가장 먼저 느꼈던 점은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가 벌레로 변했음이 나타나기 직전이다. 전날까지 잠자는 자명종 소리에 깨 식탁 위의 사과를 가져가고 길가에서 커피를 사 마시고 기차역에서 외판하고는 기차를 타고 떠나는 거로 아침을 시작한다. 공연에는 삼일이라는 시간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한정된 공연 시간에서 반복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게 잠자 인생 전부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잠자가 벌레로 변한 그날 아침 자명종 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울린다. 커피 호객 소리도 기차 소리도 한참을 울려 퍼지다 지나간다. 그 짧은 연달은 소리들로 관객은 잠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궁금했던 벌레로의 변신도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끈적한 벌레의 진액으로 충격적인 모습은 갖추어졌고, 공중에서 아등바등하다 이내 다시 꼬이는 팔과 다리들은 갑자기 늘어난 다리를 어쩔 줄 몰라하는 잠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공간구성에서도 절제된 표현들이 많은 것을 암시했다. 트여 있는 하나의 공간이지만 조명의 사용에 따라 잠자의 방, 거실, 길거리, 기차 역이 오갔다. 공간구성은 잠자의 내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공연 중간에 잠자 방의 벽이 기울어졌다가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간다. 벽의 기울음은 기어 다니기에 적합한 환경이기도 하고 많은 의미를 투영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잠자의 시선으로 그러니까 벌레의 시선으로 본 벌레의 세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그 자세가 편하고, 신선한 음식이 아니라 썩은 음식밖에 먹을 수 없게 된 것처럼 잠자의 세계는 달라졌다.

방바닥 위에 납작하게 엎드려 이는 이방, 천장이 높은 텅 빈 방은 그를 묘하게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5다년 동안이나 살아온 자신의 방이 아닌가?

동생이 오빠를 위한 마음에 음악을 틀어주며 춤을 추는 장면에서 벽이 기울어진다. 이때 동생의 춤은 잠자가 벗어날 수 없는 지면에서 이루어진다. 가상의 벽을 사이에 두고 잠자 역의 무용수도 잠자의 여동생 역의 무용수도 동일한 지면에서 몸을 움직인다. 그러나 잠자의 움직임은 고통스럽고 슬픈 벌레의 움직임인 반면 동생의 움직임은 애정을 담은 어여쁜 몸짓이다.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확연환 대비로 잠자는 벌레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반면 기울어졌던 벽이 다시 서는 장면은 자신을 사랑했던 여동생이 마음을 돌리고 화를 퍼붓는 장면이다. 이후 잠자는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벌레로서의 잠자의 삶이 끝이 나면서 혼란으로 가득 찼던 벌레의 세상도 끝이 나게 된다. 

     무용 장르의 매개체인 몸을 통해서도 간결게 하지만 잠자의 상황을 깊게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무용수의 몸짓에 따라 보는 사람들도 잠자가 벌레의 삶을 살게 되는 과정을 같이 할 수 있었다. 변신한 아침에서 깨어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스러움은 기괴하게 꺾이고 꼬이는 손과 다리를 지나 발바닥과 발가락에서까지 나타났다. 이후 철봉에 손과 발들을 가져다 놓았다가 떼는 동작이 반복되는데, 거기서는 잠자가 벌레로서의 삶의 양식에 눈을 뜨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물론 잠자가 인간 존재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검은 진액을 온몸에 진하게 칠한 무용수 둘이 등장하는데 그들과 잠자가 보여주는 안무는 잠자의 내면과 잠자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 동작 이전부터도 잠자는 일어서려 시도한다. 배를 땅과 마주한 채로 살아가는 벌레의 자세와 달리 직립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의미한다. 진액으로 뒤덮인 두 명의 배우는 검고 끈적한 진액만큼이나 더 기이하고 땅에 달라붙는 몸짓을 보여준다. 그러나 잠자는 그들과 달리 직립을 시도하고 결국 서지만 이내 다시 두 명의 다른 잠자의 모습으로 인해 좌절된다. 중간중간 일어서려 시도하는 모습처럼 잠자는 인간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누가 인간답게 살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두 명의 또 다른 잠자는 그렇게 벌레로서의 삶으로 내던지게 된 상황 그리고 벌레로서의 존재로 잠자를 체념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용의 매개체인 몸과 그 움직임은 카프카 소설 <변신>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벌레가 된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상황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무용 작품 <The metamorphosis>에서 주인공 잠자가 갖고 있는 것은 몸뿐이다. 그는 온몸을 다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당혹스러움, 고통, 슬픔, 체념 이 모든 것이 잠자가 존재하는 단 하나의 원천 즉 몸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물론 <The metamorphosis> 전반적인 연출에서 마임 동작이 많이 등장하는 등 연극적인 성격이 강한 만큼 소설과 달리 감정 표현도 강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벌레로서의 세상밖에 볼 수 없고 벌레로만 바라보아지는 삶을 살게 된, 그리고 남은 것은 육신밖에 남지 않은 존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그 온몸으로의 감정표현이다. 

     무용의 몸짓뿐만 아니라 Arthur Pita의 연출에서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지점들을 읽어낼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잠자를 둘러싼 가족의 상황을 펼쳐서 제시했다는 점이다.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지만 잠자의 내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우리는 갑작스러운 비극을 맞이한 잠자에 이입하며 그 불행에 동감하면서 가족의 매정함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벌레가 된 잠자의 내면을 이야기하는 데서 나아가 그를 둘러싼 상황을 펼쳐낸다. 먼저 벌레가 만들어내는 진액은 온 방 안을 더럽히고 이내 거실까지 침범한다. 잠자의 방과 가족의 공간이 사면으로 펼쳐져 있기에 관객은 변신이 잠자 삶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진액과 함께 퍼지는 벌레의 혐오스러움은 실제 공연에서 냄새가 점점 더 독하게 퍼져나갔던 것처럼 지울 수 없이 가족들의 삶에 퍼져나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Arthur Pita의 <The metamorphosis>가 카프카의 소설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살펴보고 그 마지막으로 가족이 가족을 혐오할 수 없게 되는 상황과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된 관객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가족들이 혐오해 마지 않는 잠자의 변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카프카의 소설에서 벌레라고 번역된 단어는 Ungeziefer이며, 여기에는 해충이라는 의미 말고도 불결하고 손대기 기피하는 의미도 담겨있다고 한다. 주인공 무용수의 기괴한 몸짓을 보면서 장애인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그 몸은 스스로에게도 낯설 뿐이다. 또한 방에서만 지내는 잠자의 생활에서 며칠 전에 본 연극 속 히키코모리가 생각났다. 감독 -는 스스로 히키코모리였는데 그는 히키코모리 자체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며 ~라고 말한다. 장애인과 히키코모리 모두 우리 사회에서는 Ungeziefer처럼 인식된다. 이들의 모습은 일반적인 생활 바깥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그들 자체의 모습이 안정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 밖에 있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배척당한다. 이들을 배척하는 외부는 앞서 살펴본 검은 진액으로 뒤덮인 잠자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것은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잠자를 벌레의 삶으로 끌어내리는 규정과 시선의 몸짓이었다. 

     일상이 반복되는 작품의 초반 장면에서 단 두 수저만을 먹는 잠자에게서 나는 인간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먹는 행위를 동물적인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 될 수 있다. 먹는 행위는 생존에 필수적이기에 우리는 삶을 즐기려 먹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일상 장면에서 잠자는 그저 돈을 버는 가장이자 사회의 구성원이었고 식사 행위마저도 그 역할을 위한 것이었다. 벌레로 변신한 잠자가 인간답지 못한 삶으로 바라보아진다면, 잠자 사회 역할 일부로서만 존재하던 잠자의 모습은 인간다운 삶이었을까. 카프카의 <변신>이 글로 인간 실존을 탐구했던 것처럼 Arthur Pita의 <The metamorphosis>는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몸을 가지고 실존을 묻는다. 








Frank Moon의 음악도 좋고

무엇보다 안무가 Edward Watson, 아아 저 근육들을 봐라... 

감독인 Arthur Pita는 이 작업을 만들 때부터 Edward Watson을 염두하고 그와 함게 무용을 짰다고 한다. 

좀더 세밀하게 보자면 그가 쓸 수 있는 몸들을 확인했던거겠지. 

발가락 근육 하나하나 움직이는 표현을 보면 감탄만 나온다. 


Posted by wmake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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