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편지

짧은 기록 2015. 4. 27. 21:56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토익알바를 하러 갔다. 아침햇빛은 너그러웠다. 강하지 않아 해를 쳐다볼 수 있었으며, 자아내는 빛의 색상은 땅의 물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들과 명확한 선을 긋지 않았다. 조금 지나서는 사라졌던 이른 아침 때의 햇빛이었다. 










전날 밤은 부모님에게 편지를 쓰고 잠들었다. 부모님에게 쓰는 편지이기에 한 번도 쓸 것 같지 않던 편지봉투에 담으려다가, 여느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고운 편지 봉투에 스티커를 붙여 닫았다. 늘상 그렇듯이 보내는 편지에는 처음 담으려던 말들을 모두 담을 수 없다. 편지를 쓰고 나서 든 생각은, 역시나 편지는 짧은 게 좋다는 생각이었다. 써야하는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하지 못했던 답답함들이 쌓여있었다는 것이다. 답답함이 터져나왔을 때 편지를 쓰는 것보다는 그 과정을 차곡차곡 지나왔던 편이 좋았을 것을. 답답함에서 시작해 편지를 스다보면 어느순간 지친다. 무엇부터 풀어야할지 어떤 방식으로 건네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비좁아 억지로 칸을 늘려 쓰는 엽서에는 이만큼밖에 전하지 못하지만 내 마음은 전달되었을 것이라는 신뢰가 첨부된다. 


어찌되었든 말을 전하려는 시도는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평생 소통할 수 없음의 무기력함을 안고 살아가겠지. 사실 편지를 써서 바로 달라진 점은 없다. 아빠는 여전히도 나의 말들을 아빠 자신의 경험으로 답했고 나는 입을 다문채 그 말들을 흘려 보냈다. 기원하는 마음으로 대화 방식의 문제를 지적했을 때 우리의 대화는 단절되었다. 우리는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오히려 차이가 명확해졌다. 나는 엄마아빠 특히 아빠가 살아온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 강인함보다는 유약함을 택할 것이며, 단련보다는 끊임없이 무너질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서 바라는 최소한의 선인 육체와 정신의 건강함, 그것과는 먼 삶을 살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안다는 것, 사실 나에게는 이게 중요했다. 나는 엄마아빠가 생각하는 그런 자식상은 아님을 말해야만 했다. 


그럼 난 엄마아빠에게서 어떤 말들을 들었을까. 차이를 말한 나또한 부모님의 차이를 들었다. 다른 직원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물병에 소변을 받아가며 엄마를 도왔던 아빠의 이야기로, 세대라는 집단으로써의 반복되는 차이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차이를 전해들었다. 내가 이걸 느꼈다라는 말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전해들었고 감히 다소 이해했다. 


우리는 어느 한쪽의 죽음과 그 이후로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왜 이해할 수 없었는지 그 이유조차도 모르고 떠나간다면 남은 자의 풀 수 없는 답답함은 해소될 수 없을 것이다. 죽음 이전에도 제도형식에 따라 최소한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기에 피상적인 관계는 누적되는 피곤과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제도 때문인지 신파적 드라마처럼 '정' 때문인지. 둘 다일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상수이지만 내가 이루는 최소한의 공동체가 계속될 수 없음은 축적된 경험으로 인해 나에게 불가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걸 없애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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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make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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