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71

          이쯤에서 보러의 고찰을 연극과 관련시켜 변형해 보는 것이 좋겠다. 메두사의 머리가 보는 것은 그녀 자신의 운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전율하는 것은 명명할 수 없는 충격적인 리얼리티와 관련이 있다. 정확히 바로 그런 이유 대문에 전율의 대상은 회화의 논리를 따르지면 재현된(재현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 머물러야만 한다. 전율의 대상은 형상이 없다. 전율케 하는 머리를 그린 시선은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려진 그림의 논리 안에서 정확히 죽은 메두사의 시선, 곧 '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시선의 죽음이며, 시선의 텅 빔이다. 시선의 방치가 곧 전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과 연극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기본뫼브가 우리들의 맥락 안으로 입장한다. 그것은 '충격'의 이념이며 '돌발성'의 이념이고, '기습당하는' 것의 이념이다. 그것은 '인식을 위해 필요한' '전율'의 이념이며 '새로움의 최초의 현시'로서 전율의 이념이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협박의 이념이다. 텅 빈 명상의 방법을 매개하는 드라마에서 벗어난 형식의 연극은 물론, 감정적이며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끔찍한 형식을 지닌 급진적 고통의 퍼포먼스 역시, 전율에 대한 현종경험의 심리학적 해석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안에서는 재현할 수 있는 대상이나 사태에 의해 촉발된 전율이 항상 주어질 수 있다. 연극미학의 차원은 충격의 구조이며, 그것의 환기는 대상 안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에서 생겨난 전율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관한 전율이 아니라, 전율 그 자체에 관한 전율이어야 한다. 그것은 충격이라는 심리적 경험에 의해 묘사될 수 있다. 우리가 갑자기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혹은 무언가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리고 이러한 소유할 수 없음, 알 수 없음이 '돌발적인' 텅 빔으로 체험될 때, 그것은 해석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전달되는 어떤 신호이다. 경험은 곧 현재이다. 이때의 경험은 정지하거나 정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경험으로써 현재는 놓침을 경험하는 것이다. 주변에 놓인 가장자리의 시간에서 경험이 발생한다.

     

          유미주의의 타당한 의심과는 반대로, 연극의 충격의 미학은 달리 책임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공연은 본질적으로 참여를 유발한다. 즉 일어난 일을 정신적으로 종합하는 고유의 책임, 이해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에도 개방적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 주의력,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관객 자체의 문제적 상황으로 지각하는 참여의 감각이 그것이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현전의 연극이다. 보러의 '절대적 현전'이라는 개념에 빗대어 현존을 연극의 현전으로 바꾸는 것은 특히 연극을 과정으로, 정동사로 생각하는 것이다. 연극은 대상일 수도 없고 본질일 수도 없다. 상상력과 이해를 통해 도달한 종합이라는 의미에서 사유하는 인식의 대상일 수도 없다. 우리는 현재를 일어난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심미적 영역에 특징적인 것으로서, 인식론적이며 심지어 윤리적 범주를 번거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보러의 '절대적 현전'이라는 표현은 심미적인 경험에서 매개, 미디어, 은유, 다른 리얼리티의 대리자를 이해하는 모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예술은 실재적인 것, 인간적인 것, 신적인 것 혹은 절대적인 것의 매개가 아니다. 예술은 게오르그 슈타이너의 의미에서 '실제 현재'가 아니다. 오히려 엄격하게 내용이 텅 빈 '다른' 것이다. 예술 작품의 현존 속에서 "그 순간 창조된 것이다. 심미적 성령강림으로서가 아니라 독특한 에피파니로서." 에피파니의 공연 방식은 체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각각의 구체적인 형상 속에서 분석과 해부를 통해 가시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전은 구체화된 시간의 선에서 지금 시점이 아니라, 그러한 시점이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으로서 이미 이행이며 동시에 과거와 다가올 미래 사이에 나타나는 일시적 정지 곧 휴지이다. 현전은 필연적으로 공동이며 현존의 미끄러짐이다. 그것은 지금을 비워버리는 사건을 특징짓고, 그러한 텅 빔 속에서 기억과 선취를 섬광처럼 빛나게 한다. 현전은 개념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과 '바로 그 순간'으로부터 나온 항상 새로운 파편 속에서 지금의 끊임없는 자기분할을 함께 실행하는 과정이다. 연극은 소환된 연극의 '삶'보다 죽음과 더욱 깊은 관련을 가져야 한다. 하이너 뮐러가 지적한 것처럼 "그러므로 연극의 특별함이란 살아있는 관객들의 현존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관객들의 현존은 것이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현전은 부유하고 사라지는 현존의 의미에서 (이것은 동시에 '지나가 버린', 부재하는, '이미 떠나버린' 것으로서 경험 안으로 들어온다) 극적 재현에 선을 그어 지워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재현의 저편을 탐새하는 일이 모든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쩌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드라마와 연극이 서로 분리된 후 극적 형상구조와 다시 제휴하고 있는 새로운 연극에게 개방될 수도 있다. 드라마와 연극을 연결하는 다리는 서술적 형식이 될 수도 있고 단순하다 못해 심지어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오래된 이야기를 전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자연주의의 이미지 허상이 빠져나오기 위해 한층 의식적이고 인공적인 양식화로 귀한하기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어떤 것이 다가올 것이다. 브레히트를 함께 읽어 보자. 


겉으로 보기에 뒤죽박죽인 이것은 진기함에 대한 열망이다. 

결코 이것의 부치 밑바닥은 닳지 않을 것이다. 

이것의 책은 끝까지 읽히지 않는다. 

계속해서 이것의 생각을 잊을 것이다. 

이것은 세계이다.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아니라고 해도

모든 것은 새롭다

적어도 모든 옛 것들보다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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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odopodo.net/forum/round/detail.asp?seq=14


1. 홍성민 글

다원예술의 형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의 연결지점을 고민하게 한다. 

      '다원예술'이라는 키워드가 예술계 여기저기서 하나의 조건이 되어버린 오늘날, 홍성민은 '다원예술'은 장르로 규정될 수 없으며 태도의 문제라고 말한다. 즉 다양한 장르나 매체가 보이는 다원예술의 형식적인 측면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물론 다원예술을 바라볼 때 다원성이라는 태도가 중욤은 이해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형식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다원예술이 장르를 해체하면서 생기는 위계의 해체는 다원적인 태도와도 연관된다. 이 지점에 대한 매끄러운 지점들을 만들어보자. 


2. 서현석 글

b.'... 그 궤적의 주변에서 시각미술과 공연예술은 새롭게 만난다. 공연예술의 가장 식상한 전통 속에서 미술의 새로운 힘이 창출되며, 모더니즘 미술의 진부한 문제의식은 무대를 생경한 차원으로 견인한다.'

   먼저 '포스트모더니즘 무용'이 오히려 미술의 모더니즘의 성격을 갖고 있는지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격이 섞여 있는지 깔끔하게 앞에 정리되었다.  위의 문장은 오늘날 미술과 공연예술의 만남을 잘 정리했다. 미술에 들어온 공연예술의 특징보다는 공연예술에 들어온 미술의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 좋은데, 그건 후자의 결과가 전자에 반영되어있기 때문이다. 먼저 전통적인 공연예술 특히 연극에서는 재현이 우위를 취하고 잇었다. 한편 모던댄스는 발레의 법칙성과 이에 반대하여 표현적인 실험을 가져온 일종의 내용의였으며 결국 하나의 전형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여기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미술의 모더니즘이 공연예술로 들오면서 공연예술은 자신의 본질적 특징으로 몸과 몸의 수행성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재현이 아닌 현존을 확인하기 위해 공연예술은 '무대를 생경한 차원으로 견인한다.' 이 신체적 현존이 미술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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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톨민, 이종흡 옮김, 『코스모폴리스』(서울: 경남대학교출판부, 1997)


근대란 무엇일까? 책의 저자 스티븐 톨민(Stephen Toulmin, 1922-2009)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근대 즉 모던(modern)을 넘어 포스트모던(post-podern)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지 회의적인 주관주의가 아니냐는 비판도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으로는 이분법 체계로 근대를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었다며 가치를 재정의하며 근대의 실험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근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와 근거는 다양하지만, 명확한 정의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확신드는 것이 있다면 근대가 이미 끝나버린 먼 옛적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사 수업을 통해 고대 그리스부터 이천여년의 시간 속에서 오늘날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에서 나아가, 『코스모폴리스』는 17세기부터 펼쳐지는 근대를 오늘날의 흐름으로 가져온다.

     그렇다면 저자는 근대를 어떻게 정의할까? 저자에 따르면 근대성을 정의할 수 있는 특징은 바로 합리성이다. 사실 일반적으로 근대는 이 합리성이라는 특징 때문에 칭찬받아왔다. 다시말해 모든 판단의 근거를 신에 두었던 암흑기 중세를 지나 다시 사람의 가치가 대두된 르네상스 이후, 드디어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성으로서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일반적 견해를 뒤집는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가 보여준 합리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형이상학적인 법칙이었다. 여기에는 당대 시대적 배경이 작용한다. 저자는 1620년대 이후로 유럽은 총체적 위기였다고 말한다. 질병, 경제 대공황, 30년 전쟁으로 인해 유럽에는 반목만이 남아있었다. 이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근대인들은 다양성을 제한하면서 기하학적인 확실성이나 필연성만을 인정했던 것이다. 『코스모폴리스』는 오히려 고대 그리스의 인문주의 유산을 물려받은 르네상스야 말로 개인의 실천과 이론을 겸비한 진정한 합리성이 가능했던 시대라고 말한다. 르네상스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합리성은 빛을 잃는다. 다양한 구전은 획일적인 기록으로 한정되고, 특수한 것은 배척되고 보편적인 것만이 추구된다. 또한 국지적인 것에서 풍부성을 발하던 태도는 일반적인 것만을 바라보게 되고, 일시적 순간의 가치를 인정하던 관점은 초시간적인 가치만을 인정하게 된다. 

     실천적인 철학관으로부터 이론적 철학관으로의 역사적인 이행은 과학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근대 합리적 사고의 기초가 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감각의 오류가능성을 증명함으로써 모든 경험을 부정하고, 이성을 통해 형이상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관념들만을 인정했다. 즉 오로지 기하학적 증명에서처럼 필연적인 논증들만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1716)는 이와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전 유럽이 소통할 수 있는 보편언어를 계획했다.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의 경우에는 데카르트의 연역적 사고와 달리 경험이나 관찰에 의거한 자연주의적 사고를 펼쳤지만 그 목적은 데카르트와 같았다. 즉 데카르트가 낳은 근대의 이분법 즉 정신과 물질의 구분을 유지하면서 경험을 기반한 정신의 합일점을 찾았다. 근대의 형이상학적 규범들을 바탕으로 물리학, 화학, 천문학 등 법칙을 낳을 수 있는 학문만이 인정받았으며 역사지질학, 심리학, 인간과학 등의 학문은 배척당했다. 

     근대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르네상스와 대비하여 근대를 탐구하는 까닭은 오늘날 우리의 위치를 진단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이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는 17세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를 근대 즉 모던이라 보고 그 이후의 포스트모던과 구분짓는 해석에 참여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르네상스 대 근대의 상황이 포스트모던 대 모던의 상황과 유비된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왜곡된 합리성의 절정인 이차세계대전을 지나 르네상스의 다양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근대 단일한 지점을 만드는 상징이었던 주권 독립국가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가며 이를 대안할 수 있는 초국가적 기구가 논의되었다. 근대의 주춧돌이던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의 와해는 일상생활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감정은 더이상 내면의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게 되었기에 전문가와 상담하는 일이 일반적이게 되었다. 과학은 더이상 하나의 단일한 법칙을 위한 통합과학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연과학들’이라는 각 분과의 상황적 특수성을 인정하는 학풍이 마련되었으며, 형이상학이 아닌 경험 또한 중시하면서 응용 영역도 강조되었다. 정리하자면 저자에 따르면 르네상스 때의 다양성의 관용은 근대를 거치며 그 빛을 잃고 포스트모던의 시대인 오늘날에 와서야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앞으로는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타당한가를 살펴볼 것이다.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저자가 책에서 펼치는 방법론 또한 근대 합리성에 대한 비판과도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경험을 배척하고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추구했던 근대인들은 그들의 방법론에서 탈상황화를 추구했다. 상황에 관계없이 고정불변하는 확실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과학사를 나아가 역사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근대의 연장선인 19세기 전반까지 이어졌다. 저자는 이를 뒤집어 재상황화하자고 주장한다. 즉 근대를 살펴보기 위해 질문들의 답을 형이상학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상황에서 무엇이 사실적으로 중시되었는가에 대한 증거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당시 역사와 과학의 상황, 정치경제적 상황 그리고 개개인의 상황을 한데 놓고 관찰한다. 저자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저자의 방법론은 특수한 상황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근대 호명에 숨겨진 목적론적-진보적 역사관의 한계를 극복한다. 

     다시 돌아가서 다양함을 담지한 합리성이 르네상스 이후 사라졌다가 포스트모던에 이르러 부활했다는 저자의 지적이 타당한가 살펴본다면,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인류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도식이 아니었나라는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르네상스 대 근대를 포스트모던과 모던으로 대치시켜, 양 시기 유사한 시대적 상황과 그에 따른 사고의 관점으로 설명하려는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이런 시도는 도식 형성을 위한 비약이라는 점을 저자가 강조하는 관용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말로 근대라는 시대에는 관용이 전무했으며 포스트모던에 이르러 비로소 등장했을까? 아니다, 관용의 역사는 분명 존재한다. 본 글에서는 이 역사를 미학에서 살펴보려 한다. 

     먼저 저자 스티븐 톨민이 근대 보편적 합리성을 추구한 사람으로 꼽은 라이프니츠를 살펴보자. 저자는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를 형이상학적 합리성의 추구라는 선상에서 같게 보았지만 이 둘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으로 본 반면 라이프니츠는 우주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그 안의 모든 각각이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전체 우주를 반영한다는 모나드(Monad)론을 펼쳤다. 이는 우주 전체가 살아있는 실체로 가득차있다는 관점으로 단 하나의 법칙만을 추구하는 왜곡된 합리성과는 다른 휴머니즘적 생각이다. 미학을 태동시킨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 1714-1762)은 바로 이 라이프니츠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바움가르텐은 라이프니츠를 이어받아 인간의 마음도 우주 전체를 생각하는 감성적 차원이 있다고 보았다. 마음 깊숙히 우주 전체를 느끼는 감성적 차원이야 말로 명료한 생각 즉 이성을 가능케 하는 근원이라고 보았다. 라이프니츠와 바움가르텐 그리고 이후 모든 미학의 길은 개개인의 감성, 다시 말해 인간이 스스로가 위치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세계와 마주하는 능동적 관계 맺음에서 인간의 사고가 촉발된다고 보았다. 여기서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근대의 주춧돌이 무너지고 더이상 하나의 법칙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와 만나는 정신적이자 물질적 존재로서의 내가 있어야 가능하며, 이는 나뿐만 아니라 무수한 다른 개별자에게도 해당되기에 하나의 법칙이 아닌 상황마다의 개개인마다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것이다. 중요한건 여기서 이성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별자에게서 시작한 감성적 판단을 기반으로 섬세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성의 작용이 필요하다. 즉 여기서의 이성과 합리성이란 저자가 칭송하는 르네상스의 합리성처럼 관용을 갖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등을 통해 계속 해서 이어진다. 저자는 근대의 합리성과 포스트모던을 대조하면서 오늘날의 철학은 급변하는 상황에서 자기회외를 꾸준하게 추진해왔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칸트는 끊임없는 자기회의를 강조하는 비판철학을 태동했기에 저자의 주장을 반증할 수 있다. 칸트로 이어지는 영향력은 실링, 헤겔 등 독일 관념론은 물론이요, 독일 낭만주의 사상가들과 나아가 20세기 초 짐멜, 하이데거, 아도르노 등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지면에 한계상 면밀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인간 경험의 합리적 가능성들을 존중하는 태도가 사라졌다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저자가 오늘날의 방향 제시를 위해 과거와 오늘날과의 유비라는 도식을 맞추면서 놓친 점들이 있다. 바로 고정된 틀에 인간을 끼워맞추려는 사고에서 벗어나 개개인을 인정하려는 끊임없는 노력들이다. 이러한 노력이 이어졌기에 저자의 주장처럼 오늘날 다양함이 빛을 낸다. 또하나 저자의 주장에서 주의해야할 점은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모든 개별성이 존중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나 그래왔듯 오늘날도 합리성은 다양한 가치를 억압하는 것으로 왜곡된다. 개개인의 가치들이 효율성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가라앉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근대의 신화인 백지상태로부터의 출발은 환상일뿐이다. 관용의 자세를 잃지 않으며 근대의 합리성이 가져다 준 세상을 면밀히 바라볼 수 있는 선물들을 가지고 무엇이 인간으로서 함께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지 알기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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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미학

카시러, <계몽주의 철학> - 7장 미학의 근본 문제, 박완규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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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평의 시대

2. 고전적 미학과 미의 객관성 문제

3. 미적 감식력의 문제와 주관주의에로 전환

4. 직관의 미학과 천재의 문제

5. 오성과 상상력: 고트쉐드와 스위스 학파

6. 체계적 미학의 정초: 바움가르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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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평의 시대

철학과 비평의 상호관계

- 형식의 통일성: 논리

- 내용의 통일성

둘의 유사성에서 18세기 철학 & 비평이 시작되었다. 이 둘간의 대립이 고조될수록 둘은 더 발전했다. 대롭 속의 통일을 알기 위해서는 통일의 가능성을 여러 각도에서 알아보는 예비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로의 원리 속에서 자신을 음미해보는 과정에서 둘은 함께 그리고 각자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이건 창조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철학과 비평의 만남을 통해 이 둘의 원리가 비평과 창조 능력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형태의 철학 =철학적 미학 =미학    : 비평능력

새로운 차원의 예술적 창조 :창조능력


=> 철학의 마지막 성과를 칸트의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 철학과 예술의 공통지점 Critic

철학: 사유, 마음의 능력에 대한 비판. 이것의 한계를 자기검증한다. 이성의 자기검증. 이때 일정한 체계가 필요하다 -> 칸트에서 성취

예술: 이 작품이 왜 좋은지 평가할때, 마음의 판정 능력에 대한 체계적인 원리가 필요하다. -> 괴테에서 성취



2. 고전적 미학과 미의 객관성 문제


1) 예술과 과학의 유사성이 이성과 함께하여 간다. 즉 주제를 관통하는 상호간의 발전 이야기.

지식에 대한 데카르트의 새로운 이념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하나로 통일되며 이에따라 모든 인식능력들도 하나로 즉 이성으로 통일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법칙의 확립이냐는 문제이다. 물론 고정불변의 논리적 규칙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함수의 공식을 만들어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형태의 타원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한 현상, 예술작품에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이다. 

근간) 데카르트 ‘하나의 원리’  => 바토, 뉴턴, 루소(일반의지: 국가체계에 개개인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원리) 


2) 고전주의

예술 자체를 지배하는 법칙은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의 본성 속에서 발견해 내는 순수 객관적 법칙이다. 자연적 대상의 실재를 알려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외적인 현상들을 주의 깊게 헤아려서 변하는 것과 불변하는 것을,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을 그리고 우리에 대해서 타당한 것과 대상 자체에서 타당한 것을 구별해 내야 한다. 즉 예술영역에서 고전주의의 정신은 다양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양을 다듬고 통제하고 제한하려는 것이다. Unity in Veriety ‘다양성 속의 통일’ 데카르트 같이 명확한 공식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예술에서는 ‘작품의 유기적 통일성’에 해당된다. 근대미학에서 고전주의 미학이 추구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점에서 상상력 또한 인정했다. 다만 예술적 Critic에서의 원리 발견을 목적으로 삼은 상상력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부알로에 따르면 창작의 자유는 표현에 관한 것뿐이다. 장르에는 그마다 장르에 적합한 내용이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표현도 내용과 형식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져야 좋은 작업이다. 이런 생각에서는 예술의 진보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갖는다. 

* Boileau, Bouhours - 둘 다 고전주의이지만 치아가 있다. 전자는 원칙을 강조하고 후자는 상상력을 강조 한다. 이 두 사람의 의견을 결합하기 시작한 사람이 Adison이다. 그는 ‘상상력과 천재의 미적 즐거움’에 대해 유럽에서 처음으로 제기했다. 이를 더 발전시킨 것이 Dubos로 감각주의자가 되어 예술의 본령은 ‘감동’이라 주장했다.


이러한 고전주의는 시간이 흐르며 왜곡된다. 자연적인 것의 기준을 살고있는 세계로부터 이끌어내려하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사회적 이상과 미학적 이상은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모든 땅이 똑같이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고전주의적 도식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미적 현상의 다양성과 가변성에 어울리는 이른이 요구된다. 



3. 미적 감식력의 문제와 주관주의에로 전환


1) 이러한 변화가 연역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원리가 현상에 의거하여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이해해야지 다양성과 가변성을 인정하면서도 훔과 같이 ‘취미판단에 있어 보편성’의 문제를 묻는 과정이 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이 시기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성의 개념이 변화했다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미학적 객관

주의를 이끌어갔던 <사물의 본성>은 이제 <인간의 본성>으로 대치된다. 미학은 논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해결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미학에서 본성의 문제가 특히 중요하다. 변화된 미학의 탐구는 말했듯이 무한한 주관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미적 감식력 Geschmack을 일종의 공통감각 Sensus Communis으로 보고, 공통감각의 본성과 가능성을 헤아리는 일이 미학의 심리학적 고찰 방법에서 기본 문제가 되었다. 

*자연에 대한 이해

- 프랑스 고전주의) 자연 = 이성, 법칙으로 이해

- 영국 경험주의) 자연 = 본성, 감각적인 본성의 의미


3)주된 내용

“미학에서는 이제 다른 규범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모든 사람이라면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일군의 개별 현상들이 있는 바, 이것들은 정확성과는 매우 거리가 멀기 때문에, 만약 이것들에 논리적 개념 방법을 적용시키면, 이 현상들은 완전히 파손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미적 사유의 가치와 매력은 정확성과 명석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적 사유가 지니는 연관의 풍부성에 있다. 비록 이러한 연관의 풍부성을 전부 개괄하지 못할지라도, 그리고 이것을 그 개별 요소로 분석하지 못할지라도, 그 매력은 조금도 손상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주관의 문제에서 살펴보면 미적 사유는 정확성을 내세우는 논리적 사유에 섬세성을 더했다. 수학적 사유처럼 개념을 고정화시키고 견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사유를 유연하게 하고 가볍게 함으로써 의미의 가장 예민한 색조와 변용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성이라는 미학적 이상과 함께 부정확성의 미학적 이상도 공존하는 것이다. 후자가 중요한 것은 미학적 상상력은 여기서 나타난다.을 덧씨우는 거짓이 나타났다. 참과 거짓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애매함이 예술이 되었다. (미적 가상의 시작)

     이 지점에서 연결해서 보면 이제 미학은 예술작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감상하는 행위가 중요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마음 속에서 나타나는 떨림. 이는 이성의 숙고에 앞선다. 규칙을 모르더라도 예술품이 훌륭하나 훌륭하지 못하냐느냐 내적 감성에 의해 판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우리는 미적 감식력을 순수 지각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흄이다. 이제 가치판단은 사물 자체의 본성에 대한 판단도 아니며, 회의주의처럼 주관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지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 있는 모종의 관계에 대한 판단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험적인 동일성을 감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생물학적인 종으로서의 인간성을 바탕으로 가능하다. 즉 어떤 평균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예외로 이루어진다. 평범한 삶 속에서 눈에 띠는 예외가 주목이나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예외에 대한 생각이 없었는데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까. 

(흄이랑은 조금 다른 주장인듯하다, 흄에게서는 어떤 평균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평균치는 좀더 자연주의적인 입장으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결합한데 의의가 있는 비판적 경험주의 흄보다는 경험주의 자체에 해당되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교수님께 질문하기 평균치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흄의 경우에는 그는 모든 사람들이 섬세함의 차이를 인정하기에 이를 바탕으로 취미의 보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구별해내는 능력을 인정한다면, 극단적 회의주의자들과는 달리 근거(대상)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대상에 마음의 능동적 작용이 들어간다. 헷갈리는게 이랬을 때 객관과 주관의 관계 중 객관에서 보편성의 근거를 찾았다. 그렇다면 주관에서는 보편성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먼저 동일한 감관이라는 근거가 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점은 마음의 능동적 작용은 보편성의 결과를 가져오는가.

“우리가 정신적 판단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물질적 요소가 중요할까 아니면 우리가 느끼는 감상이 중요할까? 흄은 이 둘 다 중요한것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인간의 능동적 해석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와 같이 말할 때 흄의 논의에서 평균치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그니까 마음의 능동적 작용은 객관이냐 주관이냐를 떠난 문제처럼 들린다. )


다음 주자로 디드로가 등장한다. 등장 배경은 평균치라는 최소한의 보편적 타당성으로는 경험주의를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의 배후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 현상의 근거를 확립하려 했다. 이를 위해 디드로는 미를 합목적성에 접목시키려했다. 그에 의하면 미적 감식력은 주관적이며 동시에 객관적이다. 그것이 개인적 감정에 기초한다는 의미에서 주관적이며, 이 감정은 개인적 경험이 수백 번 거듭된 결과라는 점에서 객관적이다. 물론 미적 감식력의 직접적 현상은 더 이상 정의될 수도 없고 설명될 수도 없으며, 말하자면 ‘그것이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한는 것’이다. (이게 나중에 천재로 이어짐) 이때 본성을 원천적인 것이 아니라 파생된 것임을 밝혀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 파생 - “미적 감식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반복, 경험에 의해 얻어진 재능으로서, 진 혹은 선이 미로 전환되는 상황을 파악하는 지능이요, 또 이러한 파악에 의해 쉽사리 감동될 수 있는 재능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미는 진에 의거하고 따라서 미를 진의 변형으로 보는 길이라는 점이다. 여기서는 진의 규범이 바뀌었을 뿐이다. 진의 내용은 더이상 선천적으로 보편 타당한 원리에 입각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경험의 유용성에 의존한다. 


이로 인해 미의 진정한 자율성상상력의 자족성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된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오직 미의 순수 직관 속에서 침잠하고 이러한 직관 내용을 온전히 살려내려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데, 이러한 최초의 사상가가 18세기의 schaftesbury이다.

-> 미적 무관심(아아 밑에 필기에서 내 생각을 정리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 자율성과 자족성으로 인해 예술이 소중한 것이 된다. 근원형식을 마주하기 쉽지 않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막아선다. 굳이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개인이 본질적으로 유한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면으로 감정을 가져가고 아집으로 해결하는 척 하거나 고통으로 끌어안고 간다. 


4. 직관의 미학과 천재의 문제

샤프츠베리(허치슨과의 비교) 중심, 숭고에 관해서는 버크의 논의


1) 샤프츠베리

고대의 순수 지혜론: 소우주(인간)-대우주 사이의 연관을 생각   cf) 경험론: 현미경을 통해 드러다 봄. 

*스토아 학파: 자연 속 logos = 우리 마음 속 logos


태제: 모든 아름다움은 진리이다) 진리가 표현되는 것이 미이다. 여기서의 진리란 우주의 내적인 의미 연관이다. 

     외부와 내부의 합일 추구 <- 개인의 능려을 최대한 자유롭게 일깨워야지 가능한 합일. 사실 이 테제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물질세계의 모든 진리는 작용하는 원리의 반영이다. 우리는 이 반영을 통해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불가분한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미를 매개로 해서 자기 자신과 세계 사이의 가장 순수한 조화를 얻는다. 인간은 (감상 활동이 아니라 - 이점이 허치슨과의 차이점) 창조활동을 통해 신의 피조물 지위에서 벗어난다. 즉 미적 활동은 자연활동이 내적 원리를 반영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 그 자체를 모방한다. 이로써 인간은 신적 창조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외부와 내부의 합일 과정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미이기에, ‘모든 아름다움은 진리이다’라는 테제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 부분 관련해서 첨언하자면, 외부와 내부의 합일에는 ‘조화로움의 원리’가 있다. 즉 하나의 동일한 근원 형석, 동일성, 법칙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개별자들이 인정된다. 동시에 이를 아우르는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이 조화로움의 원리를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이 테제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논의를 낳는다. 그 중 하나로는 천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샤프츠베리에서 강조되는 점 중 하나는 그는 데카르트 식의 관념론과 경험론을 모두 벗어난다는건데, 그는 이렇게 해서 제 3의 길을 제시한다. 어떤 점에서 이 둘을 벗어날까. 단 하나의 형이상학적 법칙만을 인정하는 관념론을 넘어 개별성을 인정한다. 경험론을 비판하는 측면에서는 (흄도 마찬가지 이유로 경험론 비판!) 경험론에서 자아는 관념의 다발이과 변형될 수 있다. 샤프츠베리에게 자아는 분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내면을 강조한 의미한다. 이렇게 관념론과 경험론을 뛰어넘는 제3의 길이 바로 ‘직관적 지성’이다. 창조과정이 선험적인 인식이나 후천적인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느낌과 판단과 평가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천재는 자연과 진리를 자신 내부에 지니고 있기에 우주의 근본 형식과 의미를 직접적으로 통찰 할 수 있다. 이로써 천재는 창조자 신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형성하고 창조하는 참된 산출력’을 지닌 존재로써, 자아는 ‘통일적 자아’로써 존재하게 된다. 

     샤프츠베리의 논의에서 또 다른 중요한 지점은 칸트로 이어지는 미학의 흐름에서 중요한 ‘무관심적 만족’이 대두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만족이란 사심없는 것으로, 목적이나 의도 욕망과 거리를 두고 그 자체로서 관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개이적 취미도 들어가지 않는데, 공유할 수 있는 감성적 공동체로 만족을 끓어올리려는 의도가 있다. 이는 샤프츠베리와 허치슨의 비교를 통해 잘 드러난다. 둘 모두는 미의 본질에 관한 직접적 인식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원천이 다르다. 샤프츠베리에게서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창조과정에 있는 반면 허치슨에게는 수용에 있다. 허치슨의 이러한 중점은 내용과 효과의 구분을 흐려, 사람들이 무엇으로 인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의 논의가 아니라 효과의 강도만을 논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자연스럽게 샤프츠베리가 직관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허치슨은 ‘내적 감관’을 강조한 차이점을 낳는다. 물론 허치슨의 내적 감관이란 반성을 바탕으로 했기에 대상에서 바로 받는 sense와 다르기는 하나, 샤프츠베리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능동적인 능력이 아니라 수동성이 강조된다. 허치슨이 이렇게 인간에게 끼치는 효과와 자극에 주목했던 것과 달리 샤프츠베리는 ‘무관심적 만족’을 이야기한다. 


 

=> 정리

1) 천재: 고전주의적 천재에서 섬세한 표현의 천재로 넘어왔다가, 샤프츠베리에 이르러 내적인 형성능력으로서의 천재. ‘형성하고 창조하는 산출력’을 천재의 핵심으로 보기 시작했다. 


2) 샤프의 핵심적 개념 미적 직관 aesthetic intuition. 근대 미학에서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칸트에게서 중요한 개념. 이걸 샤프츠베리가 처음 제시한다. ‘미는 독자적이고 근원적이요 본래적이고 필연적이다.’ 취미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근원이 가장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인간 전체의 문제인 것, 인간 정신이 피상적 도식적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 본질 자체와 닿아있기에 중요. 실현의 작용이고, 원천적 기능이다.

미학이 인간 전체의 문제이다…


어제 읽은 수잔 손택의 책에서 그녀는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나와 세계의 분리라고 말했다. 


미학이 인간 전체의 문제라고 했을대, 카시러의 입장을 빌리자면 누구나 자신을 세상 속에 위치시키는 힘이 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세계 속에서 세계와 공존하며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사람을 어떻게 만나는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를 둘러싼 사회는 어떻게 굴러가는지, 세계와 나의 대면에서 감각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 


둘의 이야기를 생각해본다면, 사실 이걸 지성적 직관 즉 내재되어있는 능력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수잔 손탁처럼 그러고 싶다고 말해야하는가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아니 마치 둘의 이야기는 모두 타고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맞다.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인식하는 것을 타고 났다. 아아, 이제 좀 알겠다. 창조라는 것은 결국 나의 해석인 것이다. 근까 여기서 개별성의 존재가 이정되는 것이다. 마치 그런 것처럼, 그니까 진수나 준영이 느끼는 그런 혼란 인간의 유한함은 내면만이 해결할 수 있는 기이함이 아니다. 누구나 안고 있는 당연한 것이다. 근데 중요한건 분명 그들만이 갖고 있는 유일함이 있다는 것. 우리는 이 양면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여기의 유일함은 나 혼자만이 안고 가야할 혹은 숨겨두어야 할 것이 아니다. 카시러가 누구나 세계를 창조해나간다고 했을 때 그리고 수잔 손택이 세계를 글쓰기를 포옹이라고 하고 글쓰기나 대화를 끊임없이 하는 것. 혹은 주원이 작은 작업들을 만들어내는 것, 가장 중요하게는 사유. 이것은 모두 창조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나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만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3) 무관심적 만족, 우리 일상적 어감에는 맞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어 관점에서는 ‘사심이 없는’ .’역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쾌락과 감각적 쾌락 구분하려 한다. 영혼의 가장 순수하고 독자적인 활동성. 형식 내지 형상의 영역을 열어준다는게 미적 차원의 중요한 의미.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이다. 아도르노도 그랬음. 이럼 맞는 대답. 형식이 외적인 형태냐는 아니다. 쉬운 예로 바하의 음악을 계속 듣는데 이를 쫒아가며 음미한다. 음악적 형식을 내가 마음속에서 함께 따라간다. 형식이 펼쳐지는 과정 즉 형식을 쫒아가는 활동이 지적 활동이다. 우리 마음에 고유한 창조적 영역이 생겨난다. 대부분 대중문화 비판하는 글들을 접하면, 결론은 형식적으로 수준이 낮다. 그럼 형식이 무엇인가? 형식에 대한 아이디얼이 항상 존재한다. 하나의 예술 장르가 도달해야 할 상을 요구하는 지점이 있다. 

     형식적 차원이 늘 변화해왔다. 그리스 조각상을 보는건 좋지만 그걸 보는 것이 익숙하기에 조금만 나이브하게 만들면 키치라고 부른다. 형식의 문제 - 독자성, 역사적 변천,, 형적 이론. 어떤 형식이 뛰어냐나는 그 형식이 우리 마음을 얼마만큼 활발하게 움직이게 해주고, 능동적 시야를 열어주는가. 이렇게 해주는데 중심이 상상력이다! 예술적 감동, 상상력 등이 다 맞물린다. 감동이 형식에서 오고, 형식은 상상력이 얼마만큼 자유롭고 새롭게 움직일 수 있는가. 

형식적 차원이 외적인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형식은 위에서 말한 지성적 직관과 창조와 관련이 있다. 내가 세상에 위치하면서 관계를 통해 그 근원형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욕망이나 목적이 수반된 일이 아니다. 나는 살아가고 있기에 그 형식을 탐구하는 것. 그래야지 내가 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 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살아것을 전부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없다는 것만이 나의 확실함이다. 그렇지만 그 짤은 순간 내가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깨달았을때의 희열, 만족감… 때로는 예술작품에서 느낀다. 어떤 작품을 보고 내가 살아가는 양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로사스 무용단의 공연을 보았을 때, 거기서 보이던 미니멀리즘에서 유닛으로서의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다면적인 개별자로를 확인했을 때, 나는 거기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다. 어제 보았던 모든 것들이 마찬가지엤지. <우주생활>도 우주의 감각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 우주의 무한함과 그를 탐미하는 과학과 기술이 감각으로서 나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등등등등등. 이것이 우리에게 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상력은. 왜 교수님이 상상력을 강조하는지가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형식이 보여주는 상상력. 이게 바로 강감을 가능케 한다고 나는 이제 이해했다. 그리고 이 이해를 놓고 싶지 않다. ‘공감의 공동체’ 아무리 현대철학이 다원성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공감의 가능성이라는 키워드를 놓아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 개별성과 보편성의 모순을 담지하는 미학… 그러니까 상상력은 타자의 개별성을 나의 개별성으로 옮겨오는 매개체이다. 세상의 근원형식은 각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내가 세상과 관계맺는 것은 결국 개인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 우리는 세상을 잘 못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개인의 탓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르게 해석하기가 너무 쉬운 세상이다.  이처럼 우리는 미세하게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때 형식을 보여주는 창조가 자리하는 것이다. 창조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세상과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타인의 공존 방법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공감이 나타난다. 그게 나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공감. 공감의 공동체. 연대. 

상상력이 보여주는 전유도 다른 맥락이 아니다. 차벽이 가로막는 집회에서 우리가 무력감을 느끼지 않도록. 우리는 삶의 의지를 갖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려는 사람들이라는 어떠한 근원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소중한 근원형식을 볼 수 없게 하는 차벽을 넘어 전유의 상상력이 이 근원형식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버크의 숭고미학

 롱기누스가 17세기 번역되면서 버크가 책 쓰면서 근대 미학에서 숭고에 대한 논의가 새로운 물꼬를 텄다.

     핵심은 unform 탈경계-경계해체, 넘어선, 초월 도약, 압도적 감동 ) 숭고의 세 가지 특징. 압도적 감동에서 재미있는 점. 감동 받는 개체는 내면의 자유가 확장되는 체험을 한다.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감동의 이론에서 버크가 숭고의 차원을 독자적으로 알려줄으로써. 예술적 감동으로 인해 내면이 고양되고 확장된다. 내면적 초월의 감동. 내면적 초월. 이게 delight.  상상력으로 공감의 공동체를 열 수 있다는 것과 맞닿아간다. 

     왜 천재와 숭고 중요? 개체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 이게 바움에서 새로 나타나는 말로 felix aestheticus  행복한 우하한 충만한 심미가) 이게 휴머니티의 이상. 새로운 인간은 펠릭스 에스테티쿠스가 되어야 한다. 근대미학이 던진 화두 꼭 기억하라! 이것이 저절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샤프츠의 천재론과 버크 숭고 논의가, 개인의 내면 - 미적 경험 할 때 내면이 어떻게 확장되고 그러면서 우리의 단편적이고 기계적인 우리의 내면이 어떻게 바뀌는가. 전인적인 인간성의 도야, 교양 이런것들이 도달해야할 지점이 어디인가. 


5. 오성과 상상력: 고트쉐드와 스위스 학파


6. 체계적 미학의 정초: 바움가르텐(수업핸드아웃 정리와 더불어)


- 논리적 인식/감성적 인식

바움가르텐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까, 의심 없이 미학을 태동한 사람으로 호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인식이라는 유개념에 감성이라는 종차를 더해 미학을 만들었다. 즉 미학은 감성적 인식이다. 바움가르텐은 이단아를 자처했다. 통상 감성적인 것은 애매모호한 것으로 열등한 판단 능력이었다. 바움가르텐은 이 열등한 것을 탐구의 대상으로 끓어올린다. 바음가르텐은 '애매모호한 인식'이라는 그 자체로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고자 노력했다. 애매모호하다는 말은 탐구대상의 상태(감성적인 것)를 말하는 것이지 이 대상에 대한 인식방법(감성적 인식)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성적 인식은 논리적 인식과는 다르지만 자신의 독특한 인식방식이 있다. 



- (도표) confuse, 외연적/내연적 명료성

모호한 표상 

명료한 표상 klar 

 

 

 : 순간적인 무의식적 느낌으로 언어로 말할 수 없다. 

 

 불명석한 표상

명석한 표상  

 

 : 쪼갤 수 없고 confuse한 표상

 

 

부적합한(합당하지 않은) 표상

적합한(합당한) 표상 

 : 어떤 대상에 대한 실제적 정의



- 예술과 미학의 정당화

이전까지 학문적 탐구 대상 즉 진리는 명료하고 명석한 표상에만 해당되었다. 즉 언어로 말할 수 있으며 요소요소 별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것만이 학문의 대상이었다. 추상화 기호화가 이런 작업이 될 것이다. ㄱ런데 미학이나 예술은 이런 작업이 아니다. 전체의 인상과 상황을 파악하는 것. 이건 조목조목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전체적인 느낌이 그렇다는 것. 이러한 아름다움은 오직 통일적 직관 즉 풍경을 정체로서 봄으로써만 획득된다. 요소 파악은 없지만 여기에는 다양함과 상이함이 있다. con-fuse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함께 녹아 있는'인 것처럼.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처럼 개별은 유기적 전체로 나타난다. 모든 대상은, 모든 인간의 마음은 우주를 담고 있다. 개별이 전체를 담보하는 보편성과 구체적 규정성 양자가 불명성학 표상을 다루는 감성적 인식에 담겨있다. 이로써 우리는 대상을 그 본래의 생명력으로서 바라볼 수 있다. 


- 이론과 실천

이렇게 해서 바음가르텐은 18세기 미학의 중심문제를 체계적으로 형식화했다. 중요한건 그의 작업이 이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바움가르텐에게 미학은 인간에 관한 학문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대상의 직관에서 그 본래의 생명역을 지니게 하는 즐거운 풍요가 가능하도록 이것을 파악하고 관계하여 자신의 색조를 불어넣는 영혼의 품성이 있다고 보았다. 훌륭한 예술가 훌륭한 미학자가 바로 이 타고난 성질이 있는 것이다. 

*아 여기서 왜 타고난 것으로 하는지..


행복한 심미가의 이상

. 내적인 자유: 마음이 욕망의 노예가 되면 안된다. 즉자적 욕망에 끌려가면 안되고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정신의 자유로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 도덕적 위대함: 마음의 이상, 호연지기. 현실적으로 안되도 마음은 넓게 가져야죠 어떤 사람이 심미적으로 - . 심미적인 사람이 되려면,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한다. 

. 선한 것을 원함: 마음의 의지를 말한다. 더 나은 것을 실천하겠다. 

. 낙관론에 대한 감성적인 확실성: 이게 라이프의 영향. 이 세계가 무의미하지 않다. 낙관적 차원을 감성적으로 확인하려 하는 것이 심미가가 가지고 있다. 

(교수님이 형이상학적 낙관론을 이야기했는데, 이해라는 거 있잖아요. 누군가 누구를 이해한다. 그런데 이해한다는게 이해를 기대하잖아요. 이 정도까지 이해하는데 더 잘 이해핳고 싶죠 이건 더 잘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전제되어있다. 각자 블랙박스가 있다고 전제하고 살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소통이 불가능하잖아요. <사랑> 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갈등을 잘 밸런스를 유지하는 건데,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바탕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이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인상과 상황이다. 문제를 이해하는데 인상과 상황이 중요하다. 이해라는 작업은 얼마든지 개선 가능하다. 정지되어있는게 아니다.낙관론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잇다. 우리의 감성적 차원이란느게 지금은 잘 개발 안되어있지만 개발하면 행복한 심미가에 도달할 수 있다. )


=> 미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합법화될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요청되고 정당화된다. 바움가르텐에게 미학은 단순히 독립된 지식 영역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하며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인간다움을 성취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참된 인간성이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인간이 유한함을 깨닫는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지적 완결성을 지니지 못하는 결핍된 인간이다. 바움가르텐은 유한한 인간이 지닌 본성과 임무를 깨닫는다. 인간이 지닌 감성을 완성하는 일이다. 이 일을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 먼저 감각 자극의 즐거움을 쫓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름다움에서 오는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자극이나 욕구가 아니라 순수직관과 순수인식에 대한 동경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를 통해 비로소 감성에 내제하는 생의 내적 운동과 순수자발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아름다움, 그건 전체를 인식할 대 온다. 전체를 인식할때의 쾌감은, 아무래도 그런거겠지.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위치하고 있느냐라는 불안감이 가시는 전체적 인식. 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를 때 우리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개별성을 인정하면서도 내며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개별성을 존중하며 동시에 이를 전체에 놓고 바라볼 수 있으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 소통이란 불가능하다. 내가 살아가는 양태를 세계 속에서 확인하는 자발성. 이건 아까도 말했듯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가 무의미해지고 내가 없어지고 불안해해지기에. 


이로써 그는 감각주의와 합리주의의 대립을 넘어서서 이성과 감성을 종합했다. 


* 예술론으로서의 미학: 허구를 긍정하면서 모방에서 벗어난다. 지금 사는 세계가 최선의 세계이나, 창조하는 인간은 마찬가지로 가능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즉 더이상 모방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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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기 전 진수가 우리의 블로그에 남긴 글을 읽었다. 아침의 통화만 때는 헤어진 이후 우리의 상황이 적당하게 괜찮다고 생각이 들었다. 진수가 헤어지기 전보다 나를 더 좋아하고 그걸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글쎄 그렇게 쓰디쓴 웃음만은 아니었다. 우리의 만남으로 그런 사람이 아니게 될 수 있었다면이라는 아쉬움도 없었다. 진수의 말대로 진수를 그런 사람으로 바라본다.

    전시와 영화로 시간을 보낸 이후 읽어본 진수의 글은 진수가 그런 사람이라는걸 말하고 있었다. '그런'게 무엇인지 진수는 정의하지 않으려 했으며 설명을 요구하는 기미가 있다면 거부하고 때로는 화냈다. 진수의 태도대로 그저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지나치기를 원했었다. 글은, 나에 대한 사랑 고마움과 자신의 잘못 미안함 못남이 얼버무려 있었다. 여전히 남쪽 길을 택하고 북쪽의 별자리를 떠올리는 글이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 이후 받은 답신을 읽고 알 수 있었건 진수가 이런 마음으로 나를 힘들어하는 행동과 말들을 했었구나였다. 내가 받는 거리두기 짜증 혼란에 대한 이해를 부탁할 때 들었더라면 우리는 아니 나는 괜찮았을까. 진수의 글을 읽고 힘이 빠졌다. 물론 거기에는 진수의 사랑이 담겨있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이 아닌 진수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걸로는 내가 부여받았던 거리두기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지는 않았다. 헤어진 이후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우리 모습에 진수는 안도한다. 나는 어디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아까 알라딘에서 산 이 책을 읽었었다. 사실 좋은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적절한 책이었다. 저자의 단순한 열정으로 살고싶은 마음은 없다. 자신의 열정을 외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는 살 수 없다. 다만 짧은 책을 가볍게 읽고 지금의 감정 또한 열정이라는 생각에 미쳤고 그래서 허망하지는 않다. 미움과 원망이 맴도는 것도 결국은 진수와 여전히 함께 하고 있고 관계를 만들고 있고 그리고 어쩌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만남을 거치며 나는 어디있냐 하면, 그래 나는 한 사람과 관계를 맺는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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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감적 경험의 현상학적 재정의: 헤르만 슈미츠의 신체현상학과 미학이론에 대하여> 

요약 기반 정리


Ⅰ. 들어가는 말

Ⅱ. . 슈미츠의 현상학적 철학과 미학이론

1. 철학함의 본령: 신체현상학적 전환을 통한 주관적 사실의 구제

2. 존재론의 기본구도와 중심개념

3. 인간학의 기본구도와 중심개념 및 감정의 이론

4. 미학이론과 예술론

. 나오는 말: 슈미츠 철학과의 생산적인 대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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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Ⅱ. . 슈미츠의 현상학적 철학과 미학이론


1. 철학함의 본령: 신체현상학적 전환을 통한 주관적 사실의 구제

슈미츠에게 철학이란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 속에서 자신을 찾는 일에 대해 성찰하는 일"이다. 그는 실증적 분과학문들이 '객관적인 사실'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철학은 '주관성' 및 '주관적 사실'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관적 사실'이라는 말은 모순처럼 들린다. 그에게 주관적 사실은 인간이 구체적인 삶의 상황 속에서 몸의 독특한 느낌을 감지하며 이해하고 평가하는 모든 감각적-정서적인 경험영역을 말한다. 이런 말로는 '주관적'은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이 점에서 슈미츠가 말하는 '신체'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에게 신체란 생물학적 육체와는 달리 몸 느낌의 상태와 경험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주관성 보다는 객관성과 어울릴법한 '사실(fact)'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신체성을 망각하게 된 전통적인 서구철학을 비판하는 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서구철학은 먼저 영혼의 형이상학을 만들었다. 즉 영혼을 상정하고 이를 몸과 분리했다. 영혼은 내면 깊숙한 비밀의 방에 갇혀 있으며 그 밖의 것은 또 각각 닫혀진 영혼으로 이루어진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성줌심주의적인 태도는 그 각각의 대상들을 어떤 속성으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우리는 대상을 객관적 감각자료로써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문제는 이와 주관적 '느낌'과의 양분을 낳은 것이다.(로고스 음성 이성 중심주의 비판) 다의적이며 카오스적인 모습은 전달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내면의 은밀한 것으로 닫혀졌다. 그러나 슈미츠는 이를 또다른 '사실'로 볼 것을 제안한다. 즉 그에 따르면 인간이 다의적이며 카오스적 모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상황이 카오스적이라 해서 소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상황의 복합성을 전달할 수 있으며 이를 손상시키지 않을 것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의 철학이 가진 진정성은 현학적인 개념이나 이론적 복잡성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구체적인 삶의 생생한 경험'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해명하느냐에 달렸다. 


2. 존재론의 기본구도와 중심개념

슈미츠는 존재론과 인간학을 바탕으로 그의를 펼치는데, 먼저 존재론이란 이간이 살아가는 시간 동안 우리가 항상 처해있는 근원적인 조건들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지평과 시선을 암암리에 특정한 관점과 각도로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먼저 칸트가 증명하려했던 "존재는 실제적인 술어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이어 존재에 대한 객관적인 판정이 불가능함을 전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원초적 현재'와 '전개된 현재'라는 양극단의 축 사이를 오가며 펼쳐지는 동적인 과정이다. 먼저 '원초적 현재'는 '극적인' 감정 상태를 체험하는 순간에 나타나며 이때, 다섯 가지 본질적인 존재론적 계기들인 '여기' '지금' '이것' '존재' '주관성'이 신체성의 절대적 지점으로 수축한다. 반면 '전개된 현재'는 이 응축상태가 풀어지는 것으로, 앞선 상태에서 인간은 순간적 감정에 사로잡혀있다면 후자에서는 주관은 개인으로서의 자립성과 사유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 두 현재가 얽힌 즉 주관적 사실들과 객관적인 사실들이 복잡하게 얽힌 인간은 이를 오가며 자신의 느낌과 사유, 판단과 행위를 수행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흄부터 시작된 인간 마음 작용의 능동성이 마찬가지로 보인다. 한편으로 재미있는 것은 슈미츠가 보기에는 늘상 원초적 현재 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기에 여기서 벗어나 전개된 현재로 가려는 노력이 동물한테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짓는 행위는 나를 바깥으로 알리는 행위이다.) 앞서 말한 주관적 사실은 '원초적 현실'과 연관된 것으로, 중요한점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예기치 않게 순간적으로 신체느낌을 통해 불현듯 현시되는 돌발적인 사건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과 인상은 슈미츠가 강조하듯 '혼돈적으로 다양'하다. 



3. 인간학의 기본구도와 중심개념 및 감정의 이론

슈미츠에 따르면 인간은 아까 살펴보았듯이 신체성의 존재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분석도 불가능한 카오스는 아니기에 슈미츠는 신체성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적 특징으로 통합적인 느낌은 '전체성', 근본적으로 빠같으로 퍼져있으며 열려 있는 흐름으로써 드러난다는 '공간성' 그리고 그 경계를 확정할 수 없는 영역들이 마치 파도 속의 섬들처럼 두드러지게 부각되었다가 사라지는 '신체섬' - 세 가지가 있다. 이러한 구조를 바탕으로 한 신체는 수축에서 확장으로의 방향을 갖고 있으며, 여기서 신체적 소통이 가능하다. 

     인간학 부분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 감정의 이론인데, "감정들은 공간적으로 퍼져있다'는 문장으로 그 핵심을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공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슈미츠는 공간을 다차원적으로   보는데 수축에서 확장의 방향 이동과 관련하여 '확장공간' '방향공간' '장소공간' 이렇게 세 가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성의 층을 바탕으로 한 감정의 이론은 개체가 극적인 상황의 강압 내지 감정적-분위기적 힘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는 과정을 신체현상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하는 구조가 된다. 


4. 미학이론과 예술론

이러한 슈미츠의 논의에서 왜 예술이 나오는 걸까? 슈미츠에 따르면 인간이 웅크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감정이 밀려오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 방안이 예술이다. '인간은 정서적 놀람의 상태에서 자신을 추스르면서 어느 정도 안정된 관계를 맺기 위해 '대상화'를 필요로 한다. 인간의 이러한 대상화를 문화적 상징형식들을 통해 실행하는데, 대상화의 방식은 담화와 언어, 신화의 의식, 개념과 이론 형성, 시와 예술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대상화한다해서 대상을 하나의 틀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상황과 인상의 호논적 다양을 최대한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시도이다. 

     슈미츠가 중요한 이유는 이 역할을 예술이나 시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감적 형성체'라는 개념으로 목소리 등 감정적-분위기적 힘의 신체적 경험을 매개하는 모든 대상을 지칭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슈미츠는 주관성의 문제를 대상에 한정짓지 않고 '미감적 태도'라는 개념으로 대상을 수용하는 사람의 독특한 태도'가 있어야 '미감적 형성체'의 고유한 뉘앙스와 감정적-분위기적 힘이 비로소 매개될 수 있다고 말한다. 



. 나오는 말: 슈미츠 철학과의 생산적인 대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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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논문 정리를 마쳤다. 중간중간 나에게 필요한 말들이라는, 그래서 이해하고 싶다는 간절한 말들이 적혀있었다. 왜 내게 필요했을까 생각해보면 먼저 인간은 고정된 것이 아님을 무한히 변하는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고 싶은 지점은 이걸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느냐는 것. 나는 진수가 모순된 매순간순간마다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시도였다. 변화하는 진수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었어야 했다. 비단 진수와의 관계에서의 문제는 아니다. 나또한 모순투성이의 인간인데 사람들에게 내가 느긴것을 어떻게 전달하는가. 칸트를 배우는 요즈음 근대미학 수업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에는 동의에의 요구가 함축되어있다. 굳이 칸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내가 느낀 것을 사람들과 나누픈 욕망은 당연히 있다. 이걸 어떻게 전할 수 있으며 동시에 나는 오해 없이 전달 받을 수 있을까. 조금 더 배우고 싶은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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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학년도 1학기 근대미학 2-3주차


D. Hume(1711-1776)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 (Of the Standard of Taste)>(1757)

 

- 흄 정리 프린트물-

흄이 주장하는 것은 인과율 해체. 예를 들어 해가 동쪽에서 내일도 뜬다는 필연성이 어디있는가. 즉 그는 인과율의 필연성을 해체했다. 인과율 관련 알아야 할 것은 인과율에는 시간적 선후가 전제되어 있다. 원인은 결과보다 앞선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엮인다. 이 커넥션의 필연성을 전제하고 법칙을 찾으려 한다. !!그런데 이게 환상이다!! 마음을 잘 들여다 보면 각각의 경험의 소스는 있지만, 엮은 것은 없다. 즉 우리가 만들어낸 가상이다. 그럼 이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반복. 물이 100도로 가열하면 오분 있다 끓는다는 사례. expect 기대가 생긴다. 기대 -> 믿음 belif. 믿음의 단계가 되면 하나의 구속력을 느끼는 감정을 갖게 된다. 이 감정이 우리가 필연성이라는 생각을 낳게 된다. 즉 흄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가 갖고 있는 인과법칙의 필연성은, 자주 반복되며 이걸 기대하고 믿음으로 강화되어, 이 단계에서 감정의 구속력을 느끼는 것. 이게 필연성이라는 가상을 낳는 원인이다. 이렇게 마음의 관념을 분석했던 흄. 이런 맥락에서 심리학자 흄. ‘연상법칙’ 처음 만듦. 관념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연상되는지 발표했다. 마음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밝히게 되는 것입니다.


“흄은 인식과 관련하여 고려될 수 있는 철학적 관계는 7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 관계는 지식과 확실성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따라 두 부류로 구별될 수 있다. 

지식과 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 관계는 관념의 본래 속성에만 의존해야 한다 - 닮음, 반대, 성질의 정도, 양과 수의 비례

관념의 본래 속성에 의존하지 않아 지식과 확실성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 동일성, 시공의 관계, 인과성”


 동일성, 시공의 관계, 인과성’ 이 세가지는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것이다. 여기서 동일성이 왜 중요하나면 자아 해체했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영향 끼친 사람 베르그송 크지만 그 다음으로 흄. 동일하게 머물러 있는 자아(영혼)의 핵심은 없다. 애매하게 변화하는 관념의 덩어리만이 있다.  위와 마찬가지로 반복, 기대를 거쳐 자아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건 자아의 동일성을 해체. 존재도 마찬가지에요. 장자 호접지몽과 비슷. 어떤 것이 실재하는지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존재에 대한 증명은 불가능하다. 존재는 감정적으로 느낄뿐. 증거, 논리적 질서를 가지고 신이나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원리에서 도출할 수도 없다. 아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건 절대 아니다. 단지 존재하는 것을 몸의 느낌으로 감정적으로 알뿐이다. 예를 들어 꿈에서 악몽을 꿀때는 악몽이 존재한다. 꿈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인 것. 그 감정적 사로잡힘이 그 대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에게 확신시키기 때문에. 무엇의 존재는 감정으로 확인하는 것이지 논리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불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증명한 것. 




- 텍스트 -

이 텍스트가 왜 중요한걸까.


일단 당대의 문제는 취미에 관한 주관주의였다. 회의주의에 빠질 위협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관적인데 어떻게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냐가 문제였다. 여기에는 시민사회라는 공동체를 위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보편적이고 상호주관적인 ‘taste’와 이 능력의 고유한 원리를 해명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다. 


이러한 시도를 했던 경험주의에서 흄이 중요한 것은, 그가 경험론자로 남아서가 아니라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결합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는 모든 정감은 옳다라는 회의주의의 입장을 인정했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taste는 보편적이라는 상반된 입장도 인정했다. 전자가 당대 보편적이었고 후자의 문제가 중요했기에 후자를 더욱 살펴보자면, 먼저 흄은 우리의 자연적 본성은 감각기관에서 비롯된다고 보았기에 그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감관을 타고 난다고 보았다. 즉 자연주의적 관점을 취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섬세함의 차이를 인정하는 능력이 있기에 이를 바탕으로 취미의 보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구별해내는 능력을 인정한다면, 극단적 회의주의자들과는 달리 근거(대상)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흄은 미에 대한 판단에 회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요소 속에 차이가 있기에 보편성이 가능하다는 입장도 유지한다. 즉 그는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를 융합한 것이다. 여기서 수업 때의 교수님의 코멘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정신적 판단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물질적 요소가 중요할까 아니면 우리가 느끼는 감상이 중요할까? 흄은 이 둘 다 중요한것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인간의 능동적 해석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내가 근대가 개개인을 강조하면서 보편성을 주장하는 근대미학에서 오는 의아함이 해결된다. 보편성은 선입견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걸 능동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마음의 작용도 필요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제 가치판단은 사물 자체의 본성에 대한 판단도 아니며, 회의주의처럼 주관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지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 있는 모종의 관계에 대한 판단이다. 

     필기를 참조하자면,

‘이후 기억과 상상력이 작동한다. 기억을 통해서 직전의 인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럼 인상이 살아있다. 반면 희미하게 남으면 관념이된다. 인상과 관념의 차이는 질적이 아니라 vividness의 문제이다. 거리를 둔 생각으로만 남아있으면 관념이 되는 것. 어떤 경우든지 외부에서 받아들인 마음의 원천(소스)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지식이 안되고 논리적 추론을 할 수 있는 능력,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능력,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인간은 이게 있다. 함께  즉, 이성(지성)이 작동해서 경험에서 지식을 얻는다. 

-> 정리하자면 인간이 지식을 얻는 방법: 경험에서 오는 인상 또는 관념 +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인 지성과 이성


* 글의 의도: 지성의 관점을 통해서, 정감의 느낌을 명료하게 밝히는 일’



마음의 능동적인 작용이라는 점에서 또다른 취미의 기준인 양식 bon sense를 생각해볼 수 있다. Common Sense에서 온 양식은 단지 지식뿐만 아니라 건전한 판단능력을 의미한다. 흄에 따르면 취미는 순수하게 감정의 문제가 아니기에 (개인의 상황을 결정하는 문화적 규범이 적용되기에) 종합적인 안목을 필요로한다. 예를 들어 ‘시의 목적은 정념과 상상력을 통해 쾌를 주는 것’이라 할때, 시는 쾌의 문제이지만 정념Passion과 상상력이라는 능동적인 마음의 작용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bon sense가 필요한 것이다.



흄이 답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의의는 논쟁거리를 던져준 것이다. 우리의 조건, 상황, 상상력의 섬세함 등 토론거리를 던져주었다. 해답은 소박하다. 그냥 역사적으로 밝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도덕, 종교 측면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와 관련해서 예술은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moral taste, social taste와 aesthetic taste가 갈등을 빚었던 것이다. 여기서 계몽주의자로서 흄의 관용이 나타난다. 흄이 말하는 정감 sentiment은 감정적 판단능력으로 여기에는 도덕적 미적 판단이 모두 들어간다. 언어로 이루어진 도덕적 또는 합리적 평가에는 모두 개인적, 문화적 전제가 깔린 언어의 모호성 또는 자의성이 개입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여기서는 수사학을 강조하는 측면이 나타난다. 정리 전체적으로 <코스모폴리스>를 계속해서 생각나게 한다. 흄은 자연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데카리트식의 본유관념을 전제하는 태도, 즉 수사학을 버리고 논리학만을 추구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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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그럼 흄의 논의에서 보편성을 도출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서 마음의 능동적 작용은 대체 무엇일까?


     카시러의 글을 살펴보면 저자인 카시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험적인 동일성을 감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생물학적인 종으로서의 인간성을 바탕으로 가능하다. 즉 어떤 평균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처럼 평균치로만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세상은 예외로 이루어진다. 평범한 삶 속에서 눈에 띠는 예외가 주목이나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예외에 대한 생각이 없었는데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까. 


(인과율 해체로 보면 카시러의 주장이 맞는 이야기같고.

흄이랑은 조금 다른 주장인듯하다, 흄에게서는 어떤 평균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평균치는 좀더 자연주의적인 입장으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결합한데 의의가 있는 비판적 경험주의 흄보다는 경험주의 자체에 해당되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교수님께 질문하기- 평균치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흄의 경우에는 그는 모든 사람들이 섬세함의 차이를 인정하기에 이를 바탕으로 취미의 보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구별해내는 능력을 인정한다면, 극단적 회의주의자들과는 달리 근거(대상)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대상에 마음의 능동적 작용이 들어간다. 헷갈리는게 이랬을 때 객관과 주관의 관계 중 객관에서 보편성의 근거를 찾았다. 그렇다면 주관에서는 보편성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먼저 동일한 감관이라는 근거가 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점은 마음의 능동적 작용은 보편성의 결과를 가져오는가.

“우리가 정신적 판단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물질적 요소가 중요할까 아니면 우리가 느끼는 감상이 중요할까? 흄은 이 둘 다 중요한것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인간의 능동적 해석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와 같이 말할 때 흄의 논의에서 평균치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그니까 마음의 능동적 작용은 객관이냐 주관이냐를 떠난 문제처럼 들린다.


대상과 나 사이 주어진 상황이 있고, 그건 어떻게 보면 보편성의 근거인거지.

그리고 이걸 나는 능동적 마음의 작용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과율이 해체된 대신 반복으로 인한 경험이 있기에 보편성이 생겨나는 것인가?! )


교수님의 답변으로는 흄이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결합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마음의 능동적인 작용을 제기했다는데 강조점을 두고 바라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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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도 1학기 근대미학 수업 1주차

수업 Handout을 기반하여 작성



1. 근대(현대 modern)’ 내지 ‘탈-근대(탈-현대 Post-modern)’ 시대 구분의 문제


*Post-modern이라는 말은 1958년 건축 분야에서 나왔고 20년후 리요타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에서 이를 수용한다. 

- 사실상 서구화와 동의어인가?

- 시대구분의 문제에서 계승과 단절,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동시성을 인정하고 감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 그렇지만 dogmatic validity가 있음. 번역하자면 독단적 설득력인데, 여기서의 독단은 대부분 사람들이 보기에 개연성이 커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2. 근대 세계 형성을 위한 시대적 배경


1) 르네상스 (14세기 초반~16세기 전반)

- 인간적 세계에 대한 관심, 즉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인간과 인본주의적 세계에 주목

- 개성의 발견과 창조

- 인문주의자들의 고전 문한 복원

* 르네상스 시작 지점 중 하나: 1350년 페트라리카가 프랑스 산을 넘으며 처음으로 자연을 Landscape로 바라봄. 이로써 더 이상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 아니라, 미적 관조를 할 수 있는 아름다움의 대상이 되었다. 


2) 종교개혁(16세기 후반~17세기 전반)

- 개인과 신을 매개하는 것이 신학자가 아니라 개인이 되었다. 

- 1460년경 구텐베르크 성서 출간


3) 시민사회의 성립

- 르네상스 휴머니즘 등장: 자본주의, 민주주의 이념, 개인주의, 자유주의

- 특히 자본주의는 자기이익의 추구를 존재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합리적인 개인을 낳는다: 홉스(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존 로크(노동가치설 주장)

- 개인의 시민권 소유(사적)와 국가에 대해 권리(공공성)을 요구하는 자유의 확대


4) 중세의 신학적-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

- 중세 말에 등장한 유명론(명목론) 득세: 인간들이 약속한 것뿐 <-> realism: 본질 존재한다

- 가치 영역들의 분화: 각 영역이 독자적인 하부체계가 되어 작동한다: 베버의 ‘합리화(탈-마법화)’ 과정과 하버마스의 수용



3. 근대미학의 등장을 위한 문화적, 사상적 배경


1) 인간 주체에 대한 사유의 변화

- 성경 창세기의 Imago Dei(신의 이미지)에 대한 인간중심적이며 인간적인 해석 등장(르네상스 사상가 Pico). 이전까지는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만 보았다면, 이제는 인간이 신만큼 창조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대두되었다. 

- 17세기에 와서는 지성, 사유능력, 판단능력 등 인간의 능동적인 가능성과 잠재력에 주목했다. 특히 데카르는 지성이 신의 가장 공평한 선물이라며, 인간은 본유관념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았다. 


2) 현세적 자연주의의 강화

- 선형 원근법의 정립으로 대상을 철저하게 기하학적으로 구조화하게 되었다. 

- 풍경화로서의 자연 등장: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와 정물화의 발전. 즉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3) 예술 활동의 세속화와 예술 개념의 변화

- 종교에서 자율적이게 되었다. 

- 르네상스 시대까지 유지되었던 ‘자유로운 기예들  vs 통속적 기예’로부터 ‘아름다운 예술 (fine arts)’ 개념 등장. 즉 정신적 예술 + 조형적 예술 합쳐진다.


4) 18세기의 주요 사회적, 문화적 특징들

- 민족국가 설립과 함께 학문의 기술적 발전 제도적 지원

- 역사(신화), 회화와 조각, 시와 연극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과 긴장 관계 … 레싱, <Laocon>

오리엔탈리즘

근대적 자연 감정: 이상적-목가적 자연, 숭고한 자연 경탄


5) 의미있는 경험을 획득하기 위한 ‘주관적 가능성(조건)’을 해명하는 과제

- ‘인식론적’ 연구의 심화, 심리적-경험적 관찰, 근본원리 규명, 분석적 방법 등을 적용

- 대륙의 합리주의적 전통과 영국의 경험론 전통: 이들은 전반적으로 계몽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으며, 인간의 지성, 이성, 기억, 지각, 감각, 감정(정념), 상상에 대한 세미한 이론적 분석을 시도

- ‘심미적 경험’(대표적으로는 대상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대한 경험)의 보편성에 대한 문제 대두: 이를 위해 ‘고유한 능력(Taste, Geschmack)과 이 능력의 고유한 원리를 해명하는 일이 중요한 이론적 과제로 부상


6) 미적(미감적, 심미적 aesthetic )경험과 예술교육이 지닌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중요성

- 근대세계의 ‘균열’과 ‘분리’를 넘어서는 치유와 종합의 과제 : 마음의 균열이 일어난 것, 즉 합리로 치우친 것 비판

- 근대 관료주의-국민경제 국가의 등장과 시민 교육 체제의 성립

*19세기 쉴러: 인간 감성을 사회정치에서 해방시키자, 이것을 예술이 할 수 있다 … 현재 랑시에르가 이어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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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의 사랑에 대한 사유


22.04.2015 수요일 미학문헌연습 특강

홍익대학교  C804

서용순 <철학을 위한 선언>, <베케트에 대하여>, <투사를 위한 철학> 등 번역한 알랭 바디우 전문가

 

경쟁과 성공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생존을 위한 갈망들로 인해 사랑은 위협받고 있다. 사랑은 나 자신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며 나아가 구조를 불가능하게 하는 위협요소이기 때문이다.동시에 달콤한 사랑은 세상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보게 한다. (여기 옆에는 서로의 안녕을 빌었던 당인리 굴뚝을 적어놓았다.)


사랑이 왜 그럴까를, 바디우는 라캉의 '비-관계'를 빌려 설명한다. 사랑은 언어(구조)로는 표현될 수 없는 '사건'의 질서에 속한다. 구조 속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의 구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 자신으로서만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나의 외부는 철저하게 나를 기준으로한 대상물이될 뿐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대상이면서 대상을 뛰어넘는다. 사랑하는 사람, 그는 분명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그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사랑에서는 하나의 주체가 되어 둘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의 지속은 결국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살아가는 고군분투이다. 사랑은 계속해서 차이를 보게 하여, 나를 둘러싼 제도 그러니까 결국은 나라는 제도에 반기를 들게 한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바라본다. 


이 과정이 쉬운 일은 아니다. 너와 나는 다르기에 우리는 절뚝거리며 걸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랑은 발을 내딛는다. 고군분투하며. 그럼에도 사랑이 소중한 것은, 사랑이 변화를 가능케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니면 우리는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다. 


"내가 쓰러뜨려야 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차이에 반대되는 동일성을 원하는 나, 차이의 프리즘 속에서 걸러지고 구축된 세계에 반대하여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려는 '자아'이다."


사랑을 하면 자기결핍을 경험한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깨닫게 한다.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동일성을 강요하는 나. 이해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기에 다만 동일성과 차이의 충돌을 극복해나갈 뿐이다. 교수님은 그래서 지치면 안된다고 말했다. 둘의 사랑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탐험을 포기할 때 사랑은 배신당한다고 했다.사랑은 슬프지만 그래서 소중한 노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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