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학
카시러, <계몽주의 철학> - 7장 미학의 근본 문제, 박완규 역,
—————————————
1. 비평의 시대
2. 고전적 미학과 미의 객관성 문제
3. 미적 감식력의 문제와 주관주의에로 전환
4. 직관의 미학과 천재의 문제
5. 오성과 상상력: 고트쉐드와 스위스 학파
6. 체계적 미학의 정초: 바움가르텐
—————————————
1. 비평의 시대
철학과 비평의 상호관계
- 형식의 통일성: 논리
- 내용의 통일성
둘의 유사성에서 18세기 철학 & 비평이 시작되었다. 이 둘간의 대립이 고조될수록 둘은 더 발전했다. 대롭 속의 통일을 알기 위해서는 통일의 가능성을 여러 각도에서 알아보는 예비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서로의 원리 속에서 자신을 음미해보는 과정에서 둘은 함께 그리고 각자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이건 창조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철학과 비평의 만남을 통해 이 둘의 원리가 비평과 창조 능력 모두에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형태의 철학 =철학적 미학 =미학 : 비평능력
새로운 차원의 예술적 창조 :창조능력
=> 철학의 마지막 성과를 칸트의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 철학과 예술의 공통지점 Critic
철학: 사유, 마음의 능력에 대한 비판. 이것의 한계를 자기검증한다. 이성의 자기검증. 이때 일정한 체계가 필요하다 -> 칸트에서 성취
예술: 이 작품이 왜 좋은지 평가할때, 마음의 판정 능력에 대한 체계적인 원리가 필요하다. -> 괴테에서 성취
2. 고전적 미학과 미의 객관성 문제
1) 예술과 과학의 유사성이 ‘이성’과 함께하여 간다. 즉 주제를 관통하는 상호간의 발전 이야기.
지식에 대한 데카르트의 새로운 이념에 의하면, 모든 지식은 하나로 통일되며 이에따라 모든 인식능력들도 하나로 즉 이성으로 통일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법칙의 확립이냐는 문제이다. 물론 고정불변의 논리적 규칙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함수의 공식을 만들어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형태의 타원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다양한 현상, 예술작품에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이다.
근간) 데카르트 ‘하나의 원리’ => 바토, 뉴턴, 루소(일반의지: 국가체계에 개개인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원리)
2) 고전주의
예술 자체를 지배하는 법칙은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의 본성 속에서 발견해 내는 순수 객관적 법칙이다. 자연적 대상의 실재를 알려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외적인 현상들을 주의 깊게 헤아려서 변하는 것과 불변하는 것을,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을 그리고 우리에 대해서 타당한 것과 대상 자체에서 타당한 것을 구별해 내야 한다. 즉 예술영역에서 고전주의의 정신은 다양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양을 다듬고 통제하고 제한하려는 것이다. Unity in Veriety ‘다양성 속의 통일’ 데카르트 같이 명확한 공식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예술에서는 ‘작품의 유기적 통일성’에 해당된다. 근대미학에서 고전주의 미학이 추구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점에서 상상력 또한 인정했다. 다만 예술적 Critic에서의 원리 발견을 목적으로 삼은 상상력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부알로에 따르면 창작의 자유는 표현에 관한 것뿐이다. 장르에는 그마다 장르에 적합한 내용이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표현도 내용과 형식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져야 좋은 작업이다. 이런 생각에서는 예술의 진보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갖는다.
* Boileau, Bouhours - 둘 다 고전주의이지만 치아가 있다. 전자는 원칙을 강조하고 후자는 상상력을 강조 한다. 이 두 사람의 의견을 결합하기 시작한 사람이 Adison이다. 그는 ‘상상력과 천재의 미적 즐거움’에 대해 유럽에서 처음으로 제기했다. 이를 더 발전시킨 것이 Dubos로 감각주의자가 되어 예술의 본령은 ‘감동’이라 주장했다.
이러한 고전주의는 시간이 흐르며 왜곡된다. 자연적인 것의 기준을 살고있는 세계로부터 이끌어내려하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사회적 이상과 미학적 이상은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모든 땅이 똑같이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고전주의적 도식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미적 현상의 다양성과 가변성에 어울리는 이른이 요구된다.
3. 미적 감식력의 문제와 주관주의에로 전환
1) 이러한 변화가 연역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원리가 현상에 의거하여 만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이해해야지 다양성과 가변성을 인정하면서도 훔과 같이 ‘취미판단에 있어 보편성’의 문제를 묻는 과정이 지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이 시기의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성의 개념이 변화했다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미학적 객관
주의를 이끌어갔던 <사물의 본성>은 이제 <인간의 본성>으로 대치된다. 미학은 논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해결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미학에서 본성의 문제가 특히 중요하다. 변화된 미학의 탐구는 말했듯이 무한한 주관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미적 감식력 Geschmack을 일종의 공통감각 Sensus Communis으로 보고, 공통감각의 본성과 가능성을 헤아리는 일이 미학의 심리학적 고찰 방법에서 기본 문제가 되었다.
*자연에 대한 이해
- 프랑스 고전주의) 자연 = 이성, 법칙으로 이해
- 영국 경험주의) 자연 = 본성, 감각적인 본성의 의미
3)주된 내용
“미학에서는 이제 다른 규범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모든 사람이라면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일군의 개별 현상들이 있는 바, 이것들은 정확성과는 매우 거리가 멀기 때문에, 만약 이것들에 논리적 개념 방법을 적용시키면, 이 현상들은 완전히 파손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미적 사유의 가치와 매력은 정확성과 명석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적 사유가 지니는 연관의 풍부성에 있다. 비록 이러한 연관의 풍부성을 전부 개괄하지 못할지라도, 그리고 이것을 그 개별 요소로 분석하지 못할지라도, 그 매력은 조금도 손상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주관의 문제에서 살펴보면 미적 사유는 정확성을 내세우는 논리적 사유에 섬세성을 더했다. 수학적 사유처럼 개념을 고정화시키고 견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사유를 유연하게 하고 가볍게 함으로써 의미의 가장 예민한 색조와 변용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성이라는 미학적 이상과 함께 부정확성의 미학적 이상도 공존하는 것이다. 후자가 중요한 것은 미학적 상상력은 여기서 나타난다.을 덧씨우는 거짓이 나타났다. 참과 거짓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애매함이 예술이 되었다. (미적 가상의 시작)
이 지점에서 연결해서 보면 이제 미학은 예술작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감상하는 행위가 중요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마음 속에서 나타나는 떨림. 이는 이성의 숙고에 앞선다. 규칙을 모르더라도 예술품이 훌륭하나 훌륭하지 못하냐느냐 내적 감성에 의해 판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우리는 미적 감식력을 순수 지각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흄이다. 이제 가치판단은 사물 자체의 본성에 대한 판단도 아니며, 회의주의처럼 주관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지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 있는 모종의 관계에 대한 판단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험적인 동일성을 감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생물학적인 종으로서의 인간성을 바탕으로 가능하다. 즉 어떤 평균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예외로 이루어진다. 평범한 삶 속에서 눈에 띠는 예외가 주목이나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예외에 대한 생각이 없었는데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까.
(흄이랑은 조금 다른 주장인듯하다, 흄에게서는 어떤 평균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평균치는 좀더 자연주의적인 입장으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결합한데 의의가 있는 비판적 경험주의 흄보다는 경험주의 자체에 해당되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교수님께 질문하기 평균치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흄의 경우에는 그는 모든 사람들이 섬세함의 차이를 인정하기에 이를 바탕으로 취미의 보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구별해내는 능력을 인정한다면, 극단적 회의주의자들과는 달리 근거(대상)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대상에 마음의 능동적 작용이 들어간다. 헷갈리는게 이랬을 때 객관과 주관의 관계 중 객관에서 보편성의 근거를 찾았다. 그렇다면 주관에서는 보편성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먼저 동일한 감관이라는 근거가 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점은 마음의 능동적 작용은 보편성의 결과를 가져오는가.
“우리가 정신적 판단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물질적 요소가 중요할까 아니면 우리가 느끼는 감상이 중요할까? 흄은 이 둘 다 중요한것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인간의 능동적 해석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와 같이 말할 때 흄의 논의에서 평균치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그니까 마음의 능동적 작용은 객관이냐 주관이냐를 떠난 문제처럼 들린다. )
다음 주자로 디드로가 등장한다. 등장 배경은 평균치라는 최소한의 보편적 타당성으로는 경험주의를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의 배후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 현상의 근거를 확립하려 했다. 이를 위해 디드로는 미를 합목적성에 접목시키려했다. 그에 의하면 미적 감식력은 주관적이며 동시에 객관적이다. 그것이 개인적 감정에 기초한다는 의미에서 주관적이며, 이 감정은 개인적 경험이 수백 번 거듭된 결과라는 점에서 객관적이다. 물론 미적 감식력의 직접적 현상은 더 이상 정의될 수도 없고 설명될 수도 없으며, 말하자면 ‘그것이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한는 것’이다. (이게 나중에 천재로 이어짐) 이때 본성을 원천적인 것이 아니라 파생된 것임을 밝혀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 파생 - “미적 감식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반복, 경험에 의해 얻어진 재능으로서, 진 혹은 선이 미로 전환되는 상황을 파악하는 지능이요, 또 이러한 파악에 의해 쉽사리 감동될 수 있는 재능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미는 진에 의거하고 따라서 미를 진의 변형으로 보는 길이라는 점이다. 여기서는 진의 규범이 바뀌었을 뿐이다. 진의 내용은 더이상 선천적으로 보편 타당한 원리에 입각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경험의 유용성에 의존한다.
이로 인해 미의 진정한 자율성과 상상력의 자족성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된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오직 미의 순수 직관 속에서 침잠하고 이러한 직관 내용을 온전히 살려내려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데, 이러한 최초의 사상가가 18세기의 schaftesbury이다.
-> 미적 무관심(아아 밑에 필기에서 내 생각을 정리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 자율성과 자족성으로 인해 예술이 소중한 것이 된다. 근원형식을 마주하기 쉽지 않다. 많은 것들이 우리를 막아선다. 굳이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개인이 본질적으로 유한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면으로 감정을 가져가고 아집으로 해결하는 척 하거나 고통으로 끌어안고 간다.
4. 직관의 미학과 천재의 문제
샤프츠베리(허치슨과의 비교) 중심, 숭고에 관해서는 버크의 논의
1) 샤프츠베리
고대의 순수 지혜론: 소우주(인간)-대우주 사이의 연관을 생각 cf) 경험론: 현미경을 통해 드러다 봄.
*스토아 학파: 자연 속 logos = 우리 마음 속 logos
태제: 모든 아름다움은 진리이다) 진리가 표현되는 것이 미이다. 여기서의 진리란 우주의 내적인 의미 연관이다.
외부와 내부의 합일 추구 <- 개인의 능려을 최대한 자유롭게 일깨워야지 가능한 합일. 사실 이 테제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물질세계의 모든 진리는 작용하는 원리의 반영이다. 우리는 이 반영을 통해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불가분한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미를 매개로 해서 자기 자신과 세계 사이의 가장 순수한 조화를 얻는다. 인간은 (감상 활동이 아니라 - 이점이 허치슨과의 차이점) 창조활동을 통해 신의 피조물 지위에서 벗어난다. 즉 미적 활동은 자연활동이 내적 원리를 반영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 그 자체를 모방한다. 이로써 인간은 신적 창조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외부와 내부의 합일 과정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미이기에, ‘모든 아름다움은 진리이다’라는 테제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 부분 관련해서 첨언하자면, 외부와 내부의 합일에는 ‘조화로움의 원리’가 있다. 즉 하나의 동일한 근원 형석, 동일성, 법칙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개별자들이 인정된다. 동시에 이를 아우르는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이 조화로움의 원리를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이 테제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논의를 낳는다. 그 중 하나로는 천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샤프츠베리에서 강조되는 점 중 하나는 그는 데카르트 식의 관념론과 경험론을 모두 벗어난다는건데, 그는 이렇게 해서 제 3의 길을 제시한다. 어떤 점에서 이 둘을 벗어날까. 단 하나의 형이상학적 법칙만을 인정하는 관념론을 넘어 개별성을 인정한다. 경험론을 비판하는 측면에서는 (흄도 마찬가지 이유로 경험론 비판!) 경험론에서 자아는 관념의 다발이과 변형될 수 있다. 샤프츠베리에게 자아는 분해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내면을 강조한 의미한다. 이렇게 관념론과 경험론을 뛰어넘는 제3의 길이 바로 ‘직관적 지성’이다. 창조과정이 선험적인 인식이나 후천적인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느낌과 판단과 평가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천재는 자연과 진리를 자신 내부에 지니고 있기에 우주의 근본 형식과 의미를 직접적으로 통찰 할 수 있다. 이로써 천재는 창조자 신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형성하고 창조하는 참된 산출력’을 지닌 존재로써, 자아는 ‘통일적 자아’로써 존재하게 된다.
샤프츠베리의 논의에서 또 다른 중요한 지점은 칸트로 이어지는 미학의 흐름에서 중요한 ‘무관심적 만족’이 대두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만족이란 사심없는 것으로, 목적이나 의도 욕망과 거리를 두고 그 자체로서 관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개이적 취미도 들어가지 않는데, 공유할 수 있는 감성적 공동체로 만족을 끓어올리려는 의도가 있다. 이는 샤프츠베리와 허치슨의 비교를 통해 잘 드러난다. 둘 모두는 미의 본질에 관한 직접적 인식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원천이 다르다. 샤프츠베리에게서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창조과정에 있는 반면 허치슨에게는 수용에 있다. 허치슨의 이러한 중점은 내용과 효과의 구분을 흐려, 사람들이 무엇으로 인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의 논의가 아니라 효과의 강도만을 논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자연스럽게 샤프츠베리가 직관을 강조했던 것과 달리 허치슨은 ‘내적 감관’을 강조한 차이점을 낳는다. 물론 허치슨의 내적 감관이란 반성을 바탕으로 했기에 대상에서 바로 받는 sense와 다르기는 하나, 샤프츠베리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능동적인 능력이 아니라 수동성이 강조된다. 허치슨이 이렇게 인간에게 끼치는 효과와 자극에 주목했던 것과 달리 샤프츠베리는 ‘무관심적 만족’을 이야기한다.
=> 정리
1) 천재: 고전주의적 천재에서 섬세한 표현의 천재로 넘어왔다가, 샤프츠베리에 이르러 내적인 형성능력으로서의 천재. ‘형성하고 창조하는 산출력’을 천재의 핵심으로 보기 시작했다.
2) 샤프의 핵심적 개념 미적 직관 aesthetic intuition. 근대 미학에서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칸트에게서 중요한 개념. 이걸 샤프츠베리가 처음 제시한다. ‘미는 독자적이고 근원적이요 본래적이고 필연적이다.’ 취미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근원이 가장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인간 전체의 문제인 것, 인간 정신이 피상적 도식적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 본질 자체와 닿아있기에 중요. 실현의 작용이고, 원천적 기능이다.
미학이 인간 전체의 문제이다…
어제 읽은 수잔 손택의 책에서 그녀는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나와 세계의 분리라고 말했다.
미학이 인간 전체의 문제라고 했을대, 카시러의 입장을 빌리자면 누구나 자신을 세상 속에 위치시키는 힘이 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세계 속에서 세계와 공존하며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사람을 어떻게 만나는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를 둘러싼 사회는 어떻게 굴러가는지, 세계와 나의 대면에서 감각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
둘의 이야기를 생각해본다면, 사실 이걸 지성적 직관 즉 내재되어있는 능력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수잔 손탁처럼 그러고 싶다고 말해야하는가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아니 마치 둘의 이야기는 모두 타고난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맞다.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인식하는 것을 타고 났다. 아아, 이제 좀 알겠다. 창조라는 것은 결국 나의 해석인 것이다. 근까 여기서 개별성의 존재가 이정되는 것이다. 마치 그런 것처럼, 그니까 진수나 준영이 느끼는 그런 혼란 인간의 유한함은 내면만이 해결할 수 있는 기이함이 아니다. 누구나 안고 있는 당연한 것이다. 근데 중요한건 분명 그들만이 갖고 있는 유일함이 있다는 것. 우리는 이 양면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여기의 유일함은 나 혼자만이 안고 가야할 혹은 숨겨두어야 할 것이 아니다. 카시러가 누구나 세계를 창조해나간다고 했을 때 그리고 수잔 손택이 세계를 글쓰기를 포옹이라고 하고 글쓰기나 대화를 끊임없이 하는 것. 혹은 주원이 작은 작업들을 만들어내는 것, 가장 중요하게는 사유. 이것은 모두 창조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나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만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3) 무관심적 만족, 우리 일상적 어감에는 맞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어 관점에서는 ‘사심이 없는’ .’역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쾌락과 감각적 쾌락 구분하려 한다. 영혼의 가장 순수하고 독자적인 활동성. 형식 내지 형상의 영역을 열어준다는게 미적 차원의 중요한 의미.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이다. 아도르노도 그랬음. 이럼 맞는 대답. 형식이 외적인 형태냐는 아니다. 쉬운 예로 바하의 음악을 계속 듣는데 이를 쫒아가며 음미한다. 음악적 형식을 내가 마음속에서 함께 따라간다. 형식이 펼쳐지는 과정 즉 형식을 쫒아가는 활동이 지적 활동이다. 우리 마음에 고유한 창조적 영역이 생겨난다. 대부분 대중문화 비판하는 글들을 접하면, 결론은 형식적으로 수준이 낮다. 그럼 형식이 무엇인가? 형식에 대한 아이디얼이 항상 존재한다. 하나의 예술 장르가 도달해야 할 상을 요구하는 지점이 있다.
형식적 차원이 늘 변화해왔다. 그리스 조각상을 보는건 좋지만 그걸 보는 것이 익숙하기에 조금만 나이브하게 만들면 키치라고 부른다. 형식의 문제 - 독자성, 역사적 변천,, 형적 이론. 어떤 형식이 뛰어냐나는 그 형식이 우리 마음을 얼마만큼 활발하게 움직이게 해주고, 능동적 시야를 열어주는가. 이렇게 해주는데 중심이 상상력이다! 예술적 감동, 상상력 등이 다 맞물린다. 감동이 형식에서 오고, 형식은 상상력이 얼마만큼 자유롭고 새롭게 움직일 수 있는가.
형식적 차원이 외적인 형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형식은 위에서 말한 지성적 직관과 창조와 관련이 있다. 내가 세상에 위치하면서 관계를 통해 그 근원형식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욕망이나 목적이 수반된 일이 아니다. 나는 살아가고 있기에 그 형식을 탐구하는 것. 그래야지 내가 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 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살아것을 전부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없다는 것만이 나의 확실함이다. 그렇지만 그 짤은 순간 내가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깨달았을때의 희열, 만족감… 때로는 예술작품에서 느낀다. 어떤 작품을 보고 내가 살아가는 양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로사스 무용단의 공연을 보았을 때, 거기서 보이던 미니멀리즘에서 유닛으로서의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다면적인 개별자로를 확인했을 때, 나는 거기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다. 어제 보았던 모든 것들이 마찬가지엤지. <우주생활>도 우주의 감각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 우주의 무한함과 그를 탐미하는 과학과 기술이 감각으로서 나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등등등등등. 이것이 우리에게 쾌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상력은. 왜 교수님이 상상력을 강조하는지가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형식이 보여주는 상상력. 이게 바로 강감을 가능케 한다고 나는 이제 이해했다. 그리고 이 이해를 놓고 싶지 않다. ‘공감의 공동체’ 아무리 현대철학이 다원성을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공감의 가능성이라는 키워드를 놓아버린 것은 절대 아니다. 개별성과 보편성의 모순을 담지하는 미학… 그러니까 상상력은 타자의 개별성을 나의 개별성으로 옮겨오는 매개체이다. 세상의 근원형식은 각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내가 세상과 관계맺는 것은 결국 개인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 우리는 세상을 잘 못 이해할 수 있다. 나는 개인의 탓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르게 해석하기가 너무 쉬운 세상이다. 이처럼 우리는 미세하게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때 형식을 보여주는 창조가 자리하는 것이다. 창조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세상과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타인의 공존 방법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공감이 나타난다. 그게 나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공감. 공감의 공동체. 연대.
상상력이 보여주는 전유도 다른 맥락이 아니다. 차벽이 가로막는 집회에서 우리가 무력감을 느끼지 않도록. 우리는 삶의 의지를 갖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려는 사람들이라는 어떠한 근원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소중한 근원형식을 볼 수 없게 하는 차벽을 넘어 전유의 상상력이 이 근원형식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버크의 숭고미학
롱기누스가 17세기 번역되면서 버크가 책 쓰면서 근대 미학에서 숭고에 대한 논의가 새로운 물꼬를 텄다.
핵심은 unform 탈경계-경계해체, 넘어선, 초월 도약, 압도적 감동 ) 숭고의 세 가지 특징. 압도적 감동에서 재미있는 점. 감동 받는 개체는 내면의 자유가 확장되는 체험을 한다.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감동의 이론에서 버크가 숭고의 차원을 독자적으로 알려줄으로써. 예술적 감동으로 인해 내면이 고양되고 확장된다. 내면적 초월의 감동. 내면적 초월. 이게 delight. 상상력으로 공감의 공동체를 열 수 있다는 것과 맞닿아간다.
왜 천재와 숭고 중요? 개체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 이게 바움에서 새로 나타나는 말로 felix aestheticus 행복한 우하한 충만한 심미가) 이게 휴머니티의 이상. 새로운 인간은 펠릭스 에스테티쿠스가 되어야 한다. 근대미학이 던진 화두 꼭 기억하라! 이것이 저절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샤프츠의 천재론과 버크 숭고 논의가, 개인의 내면 - 미적 경험 할 때 내면이 어떻게 확장되고 그러면서 우리의 단편적이고 기계적인 우리의 내면이 어떻게 바뀌는가. 전인적인 인간성의 도야, 교양 이런것들이 도달해야할 지점이 어디인가.
5. 오성과 상상력: 고트쉐드와 스위스 학파
6. 체계적 미학의 정초: 바움가르텐(수업핸드아웃 정리와 더불어)
- 논리적 인식/감성적 인식
바움가르텐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까, 의심 없이 미학을 태동한 사람으로 호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인식이라는 유개념에 감성이라는 종차를 더해 미학을 만들었다. 즉 미학은 감성적 인식이다. 바움가르텐은 이단아를 자처했다. 통상 감성적인 것은 애매모호한 것으로 열등한 판단 능력이었다. 바움가르텐은 이 열등한 것을 탐구의 대상으로 끓어올린다. 바음가르텐은 '애매모호한 인식'이라는 그 자체로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인식을 획득하고자 노력했다. 애매모호하다는 말은 탐구대상의 상태(감성적인 것)를 말하는 것이지 이 대상에 대한 인식방법(감성적 인식)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성적 인식은 논리적 인식과는 다르지만 자신의 독특한 인식방식이 있다.
- (도표) confuse, 외연적/내연적 명료성
모호한 표상
|
명료한 표상 klar |
|
|
: 순간적인 무의식적 느낌으로 언어로 말할 수 없다. |
|
불명석한 표상 |
명석한 표상 |
|
: 쪼갤 수 없고 confuse한 표상 |
|
|
부적합한(합당하지 않은) 표상 |
적합한(합당한) 표상 |
: 어떤 대상에 대한 실제적 정의 |
- 예술과 미학의 정당화
이전까지 학문적 탐구 대상 즉 진리는 명료하고 명석한 표상에만 해당되었다. 즉 언어로 말할 수 있으며 요소요소 별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것만이 학문의 대상이었다. 추상화 기호화가 이런 작업이 될 것이다. ㄱ런데 미학이나 예술은 이런 작업이 아니다. 전체의 인상과 상황을 파악하는 것. 이건 조목조목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전체적인 느낌이 그렇다는 것. 이러한 아름다움은 오직 통일적 직관 즉 풍경을 정체로서 봄으로써만 획득된다. 요소 파악은 없지만 여기에는 다양함과 상이함이 있다. con-fuse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함께 녹아 있는'인 것처럼.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처럼 개별은 유기적 전체로 나타난다. 모든 대상은, 모든 인간의 마음은 우주를 담고 있다. 개별이 전체를 담보하는 보편성과 구체적 규정성 양자가 불명성학 표상을 다루는 감성적 인식에 담겨있다. 이로써 우리는 대상을 그 본래의 생명력으로서 바라볼 수 있다.
- 이론과 실천
이렇게 해서 바음가르텐은 18세기 미학의 중심문제를 체계적으로 형식화했다. 중요한건 그의 작업이 이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바움가르텐에게 미학은 인간에 관한 학문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대상의 직관에서 그 본래의 생명역을 지니게 하는 즐거운 풍요가 가능하도록 이것을 파악하고 관계하여 자신의 색조를 불어넣는 영혼의 품성이 있다고 보았다. 훌륭한 예술가 훌륭한 미학자가 바로 이 타고난 성질이 있는 것이다.
*아 여기서 왜 타고난 것으로 하는지..
행복한 심미가의 이상
. 내적인 자유: 마음이 욕망의 노예가 되면 안된다. 즉자적 욕망에 끌려가면 안되고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정신의 자유로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 도덕적 위대함: 마음의 이상, 호연지기. 현실적으로 안되도 마음은 넓게 가져야죠 어떤 사람이 심미적으로 - . 심미적인 사람이 되려면,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한다.
. 선한 것을 원함: 마음의 의지를 말한다. 더 나은 것을 실천하겠다.
. 낙관론에 대한 감성적인 확실성: 이게 라이프의 영향. 이 세계가 무의미하지 않다. 낙관적 차원을 감성적으로 확인하려 하는 것이 심미가가 가지고 있다.
(교수님이 형이상학적 낙관론을 이야기했는데, 이해라는 거 있잖아요. 누군가 누구를 이해한다. 그런데 이해한다는게 이해를 기대하잖아요. 이 정도까지 이해하는데 더 잘 이해핳고 싶죠 이건 더 잘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전제되어있다. 각자 블랙박스가 있다고 전제하고 살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소통이 불가능하잖아요. <사랑> 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갈등을 잘 밸런스를 유지하는 건데,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바탕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이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인상과 상황이다. 문제를 이해하는데 인상과 상황이 중요하다. 이해라는 작업은 얼마든지 개선 가능하다. 정지되어있는게 아니다.낙관론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잇다. 우리의 감성적 차원이란느게 지금은 잘 개발 안되어있지만 개발하면 행복한 심미가에 도달할 수 있다. )
=> 미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합법화될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요청되고 정당화된다. 바움가르텐에게 미학은 단순히 독립된 지식 영역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하며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인간다움을 성취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참된 인간성이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인간이 유한함을 깨닫는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지적 완결성을 지니지 못하는 결핍된 인간이다. 바움가르텐은 유한한 인간이 지닌 본성과 임무를 깨닫는다. 인간이 지닌 감성을 완성하는 일이다. 이 일을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 먼저 감각 자극의 즐거움을 쫓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름다움에서 오는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자극이나 욕구가 아니라 순수직관과 순수인식에 대한 동경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를 통해 비로소 감성에 내제하는 생의 내적 운동과 순수자발성을 체험하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아름다움, 그건 전체를 인식할 대 온다. 전체를 인식할때의 쾌감은, 아무래도 그런거겠지.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위치하고 있느냐라는 불안감이 가시는 전체적 인식. 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모를 때 우리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개별성을 인정하면서도 내며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개별성을 존중하며 동시에 이를 전체에 놓고 바라볼 수 있으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 소통이란 불가능하다. 내가 살아가는 양태를 세계 속에서 확인하는 자발성. 이건 아까도 말했듯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가 무의미해지고 내가 없어지고 불안해해지기에.
이로써 그는 감각주의와 합리주의의 대립을 넘어서서 이성과 감성을 종합했다.
* 예술론으로서의 미학: 허구를 긍정하면서 모방에서 벗어난다. 지금 사는 세계가 최선의 세계이나, 창조하는 인간은 마찬가지로 가능한 세계를 만들 수 있다. 즉 더이상 모방하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