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톨민, 이종흡 옮김, 『코스모폴리스』(서울: 경남대학교출판부, 1997)
근대란 무엇일까? 책의 저자 스티븐 톨민(Stephen Toulmin, 1922-2009)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근대 즉 모던(modern)을 넘어 포스트모던(post-podern)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지 회의적인 주관주의가 아니냐는 비판도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으로는 이분법 체계로 근대를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었다며 가치를 재정의하며 근대의 실험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근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와 근거는 다양하지만, 명확한 정의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확신드는 것이 있다면 근대가 이미 끝나버린 먼 옛적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사 수업을 통해 고대 그리스부터 이천여년의 시간 속에서 오늘날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에서 나아가, 『코스모폴리스』는 17세기부터 펼쳐지는 근대를 오늘날의 흐름으로 가져온다.
그렇다면 저자는 근대를 어떻게 정의할까? 저자에 따르면 근대성을 정의할 수 있는 특징은 바로 합리성이다. 사실 일반적으로 근대는 이 합리성이라는 특징 때문에 칭찬받아왔다. 다시말해 모든 판단의 근거를 신에 두었던 암흑기 중세를 지나 다시 사람의 가치가 대두된 르네상스 이후, 드디어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성으로서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저자는 일반적 견해를 뒤집는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가 보여준 합리성은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형이상학적인 법칙이었다. 여기에는 당대 시대적 배경이 작용한다. 저자는 1620년대 이후로 유럽은 총체적 위기였다고 말한다. 질병, 경제 대공황, 30년 전쟁으로 인해 유럽에는 반목만이 남아있었다. 이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근대인들은 다양성을 제한하면서 기하학적인 확실성이나 필연성만을 인정했던 것이다. 『코스모폴리스』는 오히려 고대 그리스의 인문주의 유산을 물려받은 르네상스야 말로 개인의 실천과 이론을 겸비한 진정한 합리성이 가능했던 시대라고 말한다. 르네상스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합리성은 빛을 잃는다. 다양한 구전은 획일적인 기록으로 한정되고, 특수한 것은 배척되고 보편적인 것만이 추구된다. 또한 국지적인 것에서 풍부성을 발하던 태도는 일반적인 것만을 바라보게 되고, 일시적 순간의 가치를 인정하던 관점은 초시간적인 가치만을 인정하게 된다.
실천적인 철학관으로부터 이론적 철학관으로의 역사적인 이행은 과학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근대 합리적 사고의 기초가 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감각의 오류가능성을 증명함으로써 모든 경험을 부정하고, 이성을 통해 형이상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관념들만을 인정했다. 즉 오로지 기하학적 증명에서처럼 필연적인 논증들만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1716)는 이와 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전 유럽이 소통할 수 있는 보편언어를 계획했다.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의 경우에는 데카르트의 연역적 사고와 달리 경험이나 관찰에 의거한 자연주의적 사고를 펼쳤지만 그 목적은 데카르트와 같았다. 즉 데카르트가 낳은 근대의 이분법 즉 정신과 물질의 구분을 유지하면서 경험을 기반한 정신의 합일점을 찾았다. 근대의 형이상학적 규범들을 바탕으로 물리학, 화학, 천문학 등 법칙을 낳을 수 있는 학문만이 인정받았으며 역사지질학, 심리학, 인간과학 등의 학문은 배척당했다.
근대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르네상스와 대비하여 근대를 탐구하는 까닭은 오늘날 우리의 위치를 진단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이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는 17세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를 근대 즉 모던이라 보고 그 이후의 포스트모던과 구분짓는 해석에 참여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르네상스 대 근대의 상황이 포스트모던 대 모던의 상황과 유비된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왜곡된 합리성의 절정인 이차세계대전을 지나 르네상스의 다양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근대 단일한 지점을 만드는 상징이었던 주권 독립국가에 대한 믿음에 금이 가며 이를 대안할 수 있는 초국가적 기구가 논의되었다. 근대의 주춧돌이던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의 와해는 일상생활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감정은 더이상 내면의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게 되었기에 전문가와 상담하는 일이 일반적이게 되었다. 과학은 더이상 하나의 단일한 법칙을 위한 통합과학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연과학들’이라는 각 분과의 상황적 특수성을 인정하는 학풍이 마련되었으며, 형이상학이 아닌 경험 또한 중시하면서 응용 영역도 강조되었다. 정리하자면 저자에 따르면 르네상스 때의 다양성의 관용은 근대를 거치며 그 빛을 잃고 포스트모던의 시대인 오늘날에 와서야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앞으로는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타당한가를 살펴볼 것이다.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저자가 책에서 펼치는 방법론 또한 근대 합리성에 대한 비판과도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경험을 배척하고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추구했던 근대인들은 그들의 방법론에서 탈상황화를 추구했다. 상황에 관계없이 고정불변하는 확실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과학사를 나아가 역사를 이런 식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근대의 연장선인 19세기 전반까지 이어졌다. 저자는 이를 뒤집어 재상황화하자고 주장한다. 즉 근대를 살펴보기 위해 질문들의 답을 형이상학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상황에서 무엇이 사실적으로 중시되었는가에 대한 증거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당시 역사와 과학의 상황, 정치경제적 상황 그리고 개개인의 상황을 한데 놓고 관찰한다. 저자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저자의 방법론은 특수한 상황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근대 호명에 숨겨진 목적론적-진보적 역사관의 한계를 극복한다.
다시 돌아가서 다양함을 담지한 합리성이 르네상스 이후 사라졌다가 포스트모던에 이르러 부활했다는 저자의 지적이 타당한가 살펴본다면,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인류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도식이 아니었나라는 비판을 제기할 수 있다. 이는 르네상스 대 근대를 포스트모던과 모던으로 대치시켜, 양 시기 유사한 시대적 상황과 그에 따른 사고의 관점으로 설명하려는 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의 이런 시도는 도식 형성을 위한 비약이라는 점을 저자가 강조하는 관용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말로 근대라는 시대에는 관용이 전무했으며 포스트모던에 이르러 비로소 등장했을까? 아니다, 관용의 역사는 분명 존재한다. 본 글에서는 이 역사를 미학에서 살펴보려 한다.
먼저 저자 스티븐 톨민이 근대 보편적 합리성을 추구한 사람으로 꼽은 라이프니츠를 살펴보자. 저자는 라이프니츠와 데카르트를 형이상학적 합리성의 추구라는 선상에서 같게 보았지만 이 둘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으로 본 반면 라이프니츠는 우주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그 안의 모든 각각이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전체 우주를 반영한다는 모나드(Monad)론을 펼쳤다. 이는 우주 전체가 살아있는 실체로 가득차있다는 관점으로 단 하나의 법칙만을 추구하는 왜곡된 합리성과는 다른 휴머니즘적 생각이다. 미학을 태동시킨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 1714-1762)은 바로 이 라이프니츠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바움가르텐은 라이프니츠를 이어받아 인간의 마음도 우주 전체를 생각하는 감성적 차원이 있다고 보았다. 마음 깊숙히 우주 전체를 느끼는 감성적 차원이야 말로 명료한 생각 즉 이성을 가능케 하는 근원이라고 보았다. 라이프니츠와 바움가르텐 그리고 이후 모든 미학의 길은 개개인의 감성, 다시 말해 인간이 스스로가 위치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세계와 마주하는 능동적 관계 맺음에서 인간의 사고가 촉발된다고 보았다. 여기서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근대의 주춧돌이 무너지고 더이상 하나의 법칙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와 만나는 정신적이자 물질적 존재로서의 내가 있어야 가능하며, 이는 나뿐만 아니라 무수한 다른 개별자에게도 해당되기에 하나의 법칙이 아닌 상황마다의 개개인마다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것이다. 중요한건 여기서 이성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별자에게서 시작한 감성적 판단을 기반으로 섬세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성의 작용이 필요하다. 즉 여기서의 이성과 합리성이란 저자가 칭송하는 르네상스의 합리성처럼 관용을 갖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등을 통해 계속 해서 이어진다. 저자는 근대의 합리성과 포스트모던을 대조하면서 오늘날의 철학은 급변하는 상황에서 자기회외를 꾸준하게 추진해왔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칸트는 끊임없는 자기회의를 강조하는 비판철학을 태동했기에 저자의 주장을 반증할 수 있다. 칸트로 이어지는 영향력은 실링, 헤겔 등 독일 관념론은 물론이요, 독일 낭만주의 사상가들과 나아가 20세기 초 짐멜, 하이데거, 아도르노 등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지면에 한계상 면밀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인간 경험의 합리적 가능성들을 존중하는 태도가 사라졌다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저자가 오늘날의 방향 제시를 위해 과거와 오늘날과의 유비라는 도식을 맞추면서 놓친 점들이 있다. 바로 고정된 틀에 인간을 끼워맞추려는 사고에서 벗어나 개개인을 인정하려는 끊임없는 노력들이다. 이러한 노력이 이어졌기에 저자의 주장처럼 오늘날 다양함이 빛을 낸다. 또하나 저자의 주장에서 주의해야할 점은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모든 개별성이 존중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나 그래왔듯 오늘날도 합리성은 다양한 가치를 억압하는 것으로 왜곡된다. 개개인의 가치들이 효율성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가라앉고 있다. 저자의 말대로 근대의 신화인 백지상태로부터의 출발은 환상일뿐이다. 관용의 자세를 잃지 않으며 근대의 합리성이 가져다 준 세상을 면밀히 바라볼 수 있는 선물들을 가지고 무엇이 인간으로서 함께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지 알기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강의, 텍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스-티즈 레만, <포스트드라마 연극> (0) | 2015.08.16 |
---|---|
아르코 다원예술 (0) | 2015.06.05 |
근대미학_카시러, 미학의 근본 문제 (0) | 2015.05.17 |
아니 에르노 장편소설, <단순한 열정> (0) | 2015.05.02 |
미학문헌연습_1슈미츠 관련 논문 (0) | 2015.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