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학년도 1학기 근대미학 2-3주차
D. Hume(1711-1776)
<취미의 기준에 대하여 (Of the Standard of Taste)>(1757)
- 흄 정리 프린트물-
흄이 주장하는 것은 인과율 해체. 예를 들어 해가 동쪽에서 내일도 뜬다는 필연성이 어디있는가. 즉 그는 인과율의 필연성을 해체했다. 인과율 관련 알아야 할 것은 인과율에는 시간적 선후가 전제되어 있다. 원인은 결과보다 앞선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엮인다. 이 커넥션의 필연성을 전제하고 법칙을 찾으려 한다. !!그런데 이게 환상이다!! 마음을 잘 들여다 보면 각각의 경험의 소스는 있지만, 엮은 것은 없다. 즉 우리가 만들어낸 가상이다. 그럼 이 관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반복. 물이 100도로 가열하면 오분 있다 끓는다는 사례. expect 기대가 생긴다. 기대 -> 믿음 belif. 믿음의 단계가 되면 하나의 구속력을 느끼는 감정을 갖게 된다. 이 감정이 우리가 필연성이라는 생각을 낳게 된다. 즉 흄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가 갖고 있는 인과법칙의 필연성은, 자주 반복되며 이걸 기대하고 믿음으로 강화되어, 이 단계에서 감정의 구속력을 느끼는 것. 이게 필연성이라는 가상을 낳는 원인이다. 이렇게 마음의 관념을 분석했던 흄. 이런 맥락에서 심리학자 흄. ‘연상법칙’ 처음 만듦. 관념들이 어떻게 연관되어 연상되는지 발표했다. 마음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밝히게 되는 것입니다.
“흄은 인식과 관련하여 고려될 수 있는 철학적 관계는 7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 관계는 지식과 확실성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따라 두 부류로 구별될 수 있다.
지식과 확실성을 가질 수 있는 관계는 관념의 본래 속성에만 의존해야 한다 - 닮음, 반대, 성질의 정도, 양과 수의 비례
관념의 본래 속성에 의존하지 않아 지식과 확실성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 동일성, 시공의 관계, 인과성”
‘동일성, 시공의 관계, 인과성’ 이 세가지는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것이다. 여기서 동일성이 왜 중요하나면 자아 해체했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영향 끼친 사람 베르그송 크지만 그 다음으로 흄. 동일하게 머물러 있는 자아(영혼)의 핵심은 없다. 애매하게 변화하는 관념의 덩어리만이 있다. 위와 마찬가지로 반복, 기대를 거쳐 자아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건 자아의 동일성을 해체. 존재도 마찬가지에요. 장자 호접지몽과 비슷. 어떤 것이 실재하는지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존재에 대한 증명은 불가능하다. 존재는 감정적으로 느낄뿐. 증거, 논리적 질서를 가지고 신이나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원리에서 도출할 수도 없다. 아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건 절대 아니다. 단지 존재하는 것을 몸의 느낌으로 감정적으로 알뿐이다. 예를 들어 꿈에서 악몽을 꿀때는 악몽이 존재한다. 꿈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인 것. 그 감정적 사로잡힘이 그 대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에게 확신시키기 때문에. 무엇의 존재는 감정으로 확인하는 것이지 논리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불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증명한 것.
- 텍스트 -
이 텍스트가 왜 중요한걸까.
일단 당대의 문제는 취미에 관한 주관주의였다. 회의주의에 빠질 위협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관적인데 어떻게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냐가 문제였다. 여기에는 시민사회라는 공동체를 위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보편적이고 상호주관적인 ‘taste’와 이 능력의 고유한 원리를 해명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다.
이러한 시도를 했던 경험주의에서 흄이 중요한 것은, 그가 경험론자로 남아서가 아니라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결합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는 모든 정감은 옳다라는 회의주의의 입장을 인정했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taste는 보편적이라는 상반된 입장도 인정했다. 전자가 당대 보편적이었고 후자의 문제가 중요했기에 후자를 더욱 살펴보자면, 먼저 흄은 우리의 자연적 본성은 감각기관에서 비롯된다고 보았기에 그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감관을 타고 난다고 보았다. 즉 자연주의적 관점을 취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섬세함의 차이를 인정하는 능력이 있기에 이를 바탕으로 취미의 보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구별해내는 능력을 인정한다면, 극단적 회의주의자들과는 달리 근거(대상)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흄은 미에 대한 판단에 회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요소 속에 차이가 있기에 보편성이 가능하다는 입장도 유지한다. 즉 그는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를 융합한 것이다. 여기서 수업 때의 교수님의 코멘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정신적 판단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물질적 요소가 중요할까 아니면 우리가 느끼는 감상이 중요할까? 흄은 이 둘 다 중요한것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인간의 능동적 해석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내가 근대가 개개인을 강조하면서 보편성을 주장하는 근대미학에서 오는 의아함이 해결된다. 보편성은 선입견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걸 능동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마음의 작용도 필요한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제 가치판단은 사물 자체의 본성에 대한 판단도 아니며, 회의주의처럼 주관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지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 있는 모종의 관계에 대한 판단이다.
필기를 참조하자면,
‘이후 기억과 상상력이 작동한다. 기억을 통해서 직전의 인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럼 인상이 살아있다. 반면 희미하게 남으면 관념이된다. 인상과 관념의 차이는 질적이 아니라 vividness의 문제이다. 거리를 둔 생각으로만 남아있으면 관념이 되는 것. 어떤 경우든지 외부에서 받아들인 마음의 원천(소스)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지식이 안되고 논리적 추론을 할 수 있는 능력,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능력,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인간은 이게 있다. 함께 즉, 이성(지성)이 작동해서 경험에서 지식을 얻는다.
-> 정리하자면 인간이 지식을 얻는 방법: 경험에서 오는 인상 또는 관념 +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인 지성과 이성
* 글의 의도: 지성의 관점을 통해서, 정감의 느낌을 명료하게 밝히는 일’
마음의 능동적인 작용이라는 점에서 또다른 취미의 기준인 양식 bon sense를 생각해볼 수 있다. Common Sense에서 온 양식은 단지 지식뿐만 아니라 건전한 판단능력을 의미한다. 흄에 따르면 취미는 순수하게 감정의 문제가 아니기에 (개인의 상황을 결정하는 문화적 규범이 적용되기에) 종합적인 안목을 필요로한다. 예를 들어 ‘시의 목적은 정념과 상상력을 통해 쾌를 주는 것’이라 할때, 시는 쾌의 문제이지만 정념Passion과 상상력이라는 능동적인 마음의 작용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bon sense가 필요한 것이다.
흄이 답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의의는 논쟁거리를 던져준 것이다. 우리의 조건, 상황, 상상력의 섬세함 등 토론거리를 던져주었다. 해답은 소박하다. 그냥 역사적으로 밝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도덕, 종교 측면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와 관련해서 예술은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moral taste, social taste와 aesthetic taste가 갈등을 빚었던 것이다. 여기서 계몽주의자로서 흄의 관용이 나타난다. 흄이 말하는 정감 sentiment은 감정적 판단능력으로 여기에는 도덕적 미적 판단이 모두 들어간다. 언어로 이루어진 도덕적 또는 합리적 평가에는 모두 개인적, 문화적 전제가 깔린 언어의 모호성 또는 자의성이 개입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여기서는 수사학을 강조하는 측면이 나타난다. 정리 전체적으로 <코스모폴리스>를 계속해서 생각나게 한다. 흄은 자연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데카리트식의 본유관념을 전제하는 태도, 즉 수사학을 버리고 논리학만을 추구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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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그럼 흄의 논의에서 보편성을 도출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서 마음의 능동적 작용은 대체 무엇일까?
카시러의 글을 살펴보면 저자인 카시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험적인 동일성을 감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생물학적인 종으로서의 인간성을 바탕으로 가능하다. 즉 어떤 평균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처럼 평균치로만 세상을 볼 수 있을까. 세상은 예외로 이루어진다. 평범한 삶 속에서 눈에 띠는 예외가 주목이나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예외에 대한 생각이 없었는데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까.
(인과율 해체로 보면 카시러의 주장이 맞는 이야기같고.
흄이랑은 조금 다른 주장인듯하다, 흄에게서는 어떤 평균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평균치는 좀더 자연주의적인 입장으로,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결합한데 의의가 있는 비판적 경험주의 흄보다는 경험주의 자체에 해당되는 말이지 않을까 싶다. 교수님께 질문하기- 평균치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흄의 경우에는 그는 모든 사람들이 섬세함의 차이를 인정하기에 이를 바탕으로 취미의 보편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구별해내는 능력을 인정한다면, 극단적 회의주의자들과는 달리 근거(대상)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대상에 마음의 능동적 작용이 들어간다. 헷갈리는게 이랬을 때 객관과 주관의 관계 중 객관에서 보편성의 근거를 찾았다. 그렇다면 주관에서는 보편성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먼저 동일한 감관이라는 근거가 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점은 마음의 능동적 작용은 보편성의 결과를 가져오는가.
“우리가 정신적 판단에 관한 질문을 던져보았을 때 물질적 요소가 중요할까 아니면 우리가 느끼는 감상이 중요할까? 흄은 이 둘 다 중요한것을 받아들인다. 이로써 인간의 능동적 해석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와 같이 말할 때 흄의 논의에서 평균치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그니까 마음의 능동적 작용은 객관이냐 주관이냐를 떠난 문제처럼 들린다.
대상과 나 사이 주어진 상황이 있고, 그건 어떻게 보면 보편성의 근거인거지.
그리고 이걸 나는 능동적 마음의 작용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과율이 해체된 대신 반복으로 인한 경험이 있기에 보편성이 생겨나는 것인가?! )
교수님의 답변으로는 흄이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결합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마음의 능동적인 작용을 제기했다는데 강조점을 두고 바라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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