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납득하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말들
(지난 일기를 뒤적이다. 2015년 초에 쓴걸 보았다. )
J는 정신이 없고 바쁘고 산만하고 (내가 생각하는) 배려심은 갖추고 있지 못한다. 그리고 어쩌면 나보다 극단적이고 예민하다. 나와 비슷한 성질들이 많다보니 나에게서는 그것들이 약해진다. 아니 그보다는 J도 사람이다. 완벽하게 일처리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J도 쉽게 깨지고 다치는 사람이었다.
새벽 5시 잠에서 깨었을 때, 부모님이 대화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각자의 시간 중 서로와 공유하는 시간이다. J에게는 이런 시간이 가능할까? 어제의 만남에서 나와 공유한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웠다. J 말대로 어떤 위험이나 문제가 감지되었을 때, 그제서야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간을 공유했다.
삶의 태도로 가져왔을 때 우리는 수많은 시간을 생산하기 위해 소비한다. 아니.. 이런 문제로 J를 소급할 수는 없다. J도 우리의 여수에서의 시간처럼 생산에서 벗어나 서로의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시간을 좋아하며 원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시지프스의 굴레는 단단하다. J의 작업에 앞서 J의 삶의 태도는 과연 무엇일까? ‚발작’이 존재하지 않는다. 굴레는 굴러간다. 멈추지 않는다.
J가 인간인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인간인 것은, 삶의 부재에서 나온자. 잘업과 삶이 불리되지는 않지만 작업 이전의 삶은 어디있는가. 일을 배제한 관계의 부재, 존재의 부재, 성공으로 구분되는 개죽음.
이름을 부르고 싶은 욕구와 x로 치환하고 싶은 욕구 - J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건 여전히 그와의 관계가 내 삶 일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사랑하고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고 정성을 다했다. 실패까지도 나의 시도로 남아있어서 생각을 떨칠수가 없다. 더 나은 선택에 대해 끊임없이 다시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를 설명하지 못한다. 스스로에게도 설명하지 못한다. 아직 정리되지 못했어라는 말로 그저 떠올리는 것만을 반복한다. 아무것도 모르겠어 나는. 그 누구도 탓하고 싶지 않다. 둘다 나쁜 사람으로 남지 않으려는 욕심이 커서 지금까지도 서로를 괴롭히고 있다. 피해자-가해자의 구도는 명확해질 수 없다. 그렇기에 받은 상처와 저지른 잘못이 뒤엉켜서 정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게 된다.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더 우리의 관계를 풀어서 내가 납득할 수 있게 하는 것뿐.
그렇게 정리하려 애쓰다 보면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특정한 말이 어느 한 시기 동안 자리잡게 된다. 지금 내가 J를 더이상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나를 설득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관계에서 감정노동의 짐은 나만이 짊어지었기 때문이다. 항상 그렇듯 J는 내게 특별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위치하는 개인이 된다. 일반화시킨다는 두려움이 있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그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새벽에 서로를 공유하는 대화가 가능하냐는 위의 질문에 나는 여전히 아니라고 단박에 대답했다. 관계를 이어나가려는 군투를 혼자 겪어야했다는게 아직도 허탈함으로 남는다. J도 나름대로 고군분투 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노력이 더 어렵고 복잡해지더라도 같이 풀어나가야 한다는게 J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내가 한 그 시도는 허탈하게 끝났다. 그에게는 감정노동보다 중요한게 있으니까. 내게는 관계가 중요해서 아직까지도 이렇게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J에게서 연락을 받았고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수없이 머리 속으로 대답했다. 그 중에서 정리할 수 있었던 건. 그렇게 못되게 굴어놓고 나에 대한 좋은 감정이 없어놓고서 어떻게 이렇게 뻔뻔하게 다시 연락할 수 있는지 - 이걸,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누구나 외로움과 떨어져 살 수 없고 외로움은 그리움과 함께 찾아온다. 서로에게 난사했던 상처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지만 또 다시 안부를 묻는다. 너/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나/너를 사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