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강산무진>
지금은틀리고그때는맞든, 상관없다. 솔직한다 한들 찌질함과 병신같음이 어디 가겠나.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어디든 정신을 팔아야 지낼 수 있었던 추석이었기에 집어든 책이었다. 물론 이 책에는 병신같음은 없고 진지함이 있다. 글쎄 그렇지만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바라보는 그리고 풀어내는 태도의 차이는 결정적인걸 알면서도 이렇게는죽고사는문제저렇게는가벼운농담이되는것이다. 이념이라는 대의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을 버리고 동시에 그 대의가 낳는 고통의 일면으로 다른 여자와 살아야 하는 남자. 그 남자와 사랑하는 삶을 기다리는 여자. 네네, 그 얼마나 아련하고 숭고한 사랑입니까, 더군다나 삶의 의지 제로인 내게 결국 그 의지로 끝나는 결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었다.
뒤틀린 채로 책일기를 끝마치고 죽은 듯 연휴를 지낼 때 그제서야 책 생각이 났었다. 삶의 의지에 대한 주창이 다가온 것은 아니였다. 오히려 죽음의 부분이 다가왔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다시 잠에 들고 잠시 깨어있는 시간 속에서도 휘청거리는 나는 살아있지 않구나 싶었다. 책 속에서 이상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개별자가 할 수 있는 변화들, 손 끝으로 재료를 다듬으며 느끼는 생의 감각, 단순노동에서 오는 깨어있음. 이 모든 것들 우습게도 나또한 긍정했던 것이다. 어쩌겠어 삶의 의지가 집어치우고 싶은 잔소리처럼 들리더라도 죽음의 영역에서 돌아오기 위해서는 필요하다. 햇살처럼 아주 간단한 주문들. 높게 치달을 때 들리는 그네의 삐그덕 소리.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가 삶의 의지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죽음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좋았던 책은 아니었다. 전경린을 여성주의 작가로 칭하던게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다른 여성작가들은 어땠지 돌이켜보게했던건, 여성의 기다림이 놓인 자리였다. 큰 목표를 두었기에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남자를 기다리는 여성의 위치는 남성의 보금자리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에서는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수동적인 위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주인공을 갈망하던 부장과 섹스를 했을 때도 그건 부장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부장과의 관계의 시작은 남성의 호혜였지만 결국 이룬 마주함은 둘 모두에게 감각을 일깨우기 위한 장치로서 작동했다. 여기에 남주인공의 존재가 죄책감의 기제로서 작동할 필요는 없다. 나는 너를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기 위해 살아가는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존재가 필요하니까. 기다림을 수동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기다림는 행위가 너에 달린 것이 아니고 내게 달린 일이다. 여기에 기다림이 끝났다라는 종결은 중요하지 않다.
*확실히 이 두 지점-삶의 의지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건 결국 죽음이라는 점, 기다림이 삶을 만든다는 점-들은 전경린 여성이 만들었다고 생각든다. 니체나 토마스 만의 글은 내가 스스로 발을 딛고 살아갈 수 있을 때 도움이 되지만 이 책을 읽었을 때에는 적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다림의 경험은 <사랑의 단상>의 사례를 들어서처럼 일반화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많은 소설에서 이 기다림의 영역이 누구의 몫이었나를 떠올려보면 여성 작가 전경린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단순한 열정>에서의 기다림도 좋은 참조거리.
<강산무진>
홍상수 영화 이야기를 한다면서 애먼데를 다녀왔다. 되돌아기 위해 거쳐야할 지점인 <강산무진>으로 돌아오자면,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를 읽고 바로 편 책이 이 책이었다. 앞 쪽 단편 두개만 읽고도 정이 떨어졌다. (물론 그 이후 더 읽는 중이긴하다만) 아니 대체 왜 상처받은 남성은 여성을 안아야만 합니까. 당신들의 상처는 알겠어요. 오줌발 서지 않는 중년 남성의 고통은 흡연구역을 찾아 해매는 제가 아주 감히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다만, 그 치유를 성적 대상에서 찾는 점 동시에 그 아련해보이는 고통으로 인해 성적 치부는 용서하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게 노년이든 청년이든 간에. 그리고 '자연의 이치처럼' 당신에게 품을 벌려준/ 당신의 영업을 위해 안겨야 했던/ 병들어 죽어가며 그 모습이 남편인 당신에게까지 수치스러웠던/ 그런 아내를 간병하는 당신에게 상상 속에서나마 삶의 희망이 되어주었던 여자들의 삶은 어디에 갔습니까. 그니까 말하자면 결국 당신의 삶을 유지시켜 주었지만 마치 당신에 의해 운명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여자들의 삶이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찌질함이니 병신같음이니 뭐라 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고마웠다. 맞건틀리건 보여주어서. 물론 처음에는 짜증나기도 했다. 과장되어 그려지기는 하지만 인물들이 하는 사랑은 결국 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나 바보같은 공식인가, 말(유려하던 서툰척 하던 한 구석 차지하고 있는 말들), 어쭙잖은 감수성 한 방울, 여기에 남자 여자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완성. 물론 술이 강한 촉매재가 되기는 하지만 없어도 된다. 도달점 없이 지칭으로 돌고 도는 홍상수표 대사처럼 감정은 관계는 우스꽝스럽게 이리저리 돌아댄다. 그게 싫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 흐름에 휘말렸던 게 바보 같았다. 바보 같은걸 싫어하면 난 다신 저런 감정 마주할 수 없을까 생각할 때 즈음 두 번 째 루틴이 시작되었다.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피식 웃으며 영화를 보았다. <강산무진>은 사랑이며 인생이며 하는 것들을 저 위에 올려놓았기에 아래 남겨지는 읽는 사람은 무력하게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농담거리로 바닥에 던져놓는다. 다시 낼름 주워 먹기 쉽게. 몸 두 개가 만나 서로 반응하는데 그건 거스를 수 없을뿐더러 애석하게도 우리 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걸 부정하면 삶을 부정하게 된다. 맞건 틀리건 우린 또 그렇게 살 것이다. 실은 휘말린 적 없다. 시답잖은 미세한 말들과 몸짓들 우리가 만든 거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