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텍스트

한스-티즈 레만, <포스트드라마 연극>

wmakesn 2015. 8. 16. 18:37
p.271

          이쯤에서 보러의 고찰을 연극과 관련시켜 변형해 보는 것이 좋겠다. 메두사의 머리가 보는 것은 그녀 자신의 운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전율하는 것은 명명할 수 없는 충격적인 리얼리티와 관련이 있다. 정확히 바로 그런 이유 대문에 전율의 대상은 회화의 논리를 따르지면 재현된(재현할 수 있는) 세계의 바깥에 머물러야만 한다. 전율의 대상은 형상이 없다. 전율케 하는 머리를 그린 시선은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려진 그림의 논리 안에서 정확히 죽은 메두사의 시선, 곧 '보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시선의 죽음이며, 시선의 텅 빔이다. 시선의 방치가 곧 전율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과 연극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기본뫼브가 우리들의 맥락 안으로 입장한다. 그것은 '충격'의 이념이며 '돌발성'의 이념이고, '기습당하는' 것의 이념이다. 그것은 '인식을 위해 필요한' '전율'의 이념이며 '새로움의 최초의 현시'로서 전율의 이념이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협박의 이념이다. 텅 빈 명상의 방법을 매개하는 드라마에서 벗어난 형식의 연극은 물론, 감정적이며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끔찍한 형식을 지닌 급진적 고통의 퍼포먼스 역시, 전율에 대한 현종경험의 심리학적 해석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안에서는 재현할 수 있는 대상이나 사태에 의해 촉발된 전율이 항상 주어질 수 있다. 연극미학의 차원은 충격의 구조이며, 그것의 환기는 대상 안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에서 생겨난 전율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관한 전율이 아니라, 전율 그 자체에 관한 전율이어야 한다. 그것은 충격이라는 심리적 경험에 의해 묘사될 수 있다. 우리가 갑자기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혹은 무언가를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리고 이러한 소유할 수 없음, 알 수 없음이 '돌발적인' 텅 빔으로 체험될 때, 그것은 해석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전달되는 어떤 신호이다. 경험은 곧 현재이다. 이때의 경험은 정지하거나 정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경험으로써 현재는 놓침을 경험하는 것이다. 주변에 놓인 가장자리의 시간에서 경험이 발생한다.

     

          유미주의의 타당한 의심과는 반대로, 연극의 충격의 미학은 달리 책임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공연은 본질적으로 참여를 유발한다. 즉 일어난 일을 정신적으로 종합하는 고유의 책임, 이해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에도 개방적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 주의력,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관객 자체의 문제적 상황으로 지각하는 참여의 감각이 그것이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현전의 연극이다. 보러의 '절대적 현전'이라는 개념에 빗대어 현존을 연극의 현전으로 바꾸는 것은 특히 연극을 과정으로, 정동사로 생각하는 것이다. 연극은 대상일 수도 없고 본질일 수도 없다. 상상력과 이해를 통해 도달한 종합이라는 의미에서 사유하는 인식의 대상일 수도 없다. 우리는 현재를 일어난 어떤 것으로 이해하고, 심미적 영역에 특징적인 것으로서, 인식론적이며 심지어 윤리적 범주를 번거롭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보러의 '절대적 현전'이라는 표현은 심미적인 경험에서 매개, 미디어, 은유, 다른 리얼리티의 대리자를 이해하는 모든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예술은 실재적인 것, 인간적인 것, 신적인 것 혹은 절대적인 것의 매개가 아니다. 예술은 게오르그 슈타이너의 의미에서 '실제 현재'가 아니다. 오히려 엄격하게 내용이 텅 빈 '다른' 것이다. 예술 작품의 현존 속에서 "그 순간 창조된 것이다. 심미적 성령강림으로서가 아니라 독특한 에피파니로서." 에피파니의 공연 방식은 체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각각의 구체적인 형상 속에서 분석과 해부를 통해 가시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전은 구체화된 시간의 선에서 지금 시점이 아니라, 그러한 시점이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으로서 이미 이행이며 동시에 과거와 다가올 미래 사이에 나타나는 일시적 정지 곧 휴지이다. 현전은 필연적으로 공동이며 현존의 미끄러짐이다. 그것은 지금을 비워버리는 사건을 특징짓고, 그러한 텅 빔 속에서 기억과 선취를 섬광처럼 빛나게 한다. 현전은 개념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과 '바로 그 순간'으로부터 나온 항상 새로운 파편 속에서 지금의 끊임없는 자기분할을 함께 실행하는 과정이다. 연극은 소환된 연극의 '삶'보다 죽음과 더욱 깊은 관련을 가져야 한다. 하이너 뮐러가 지적한 것처럼 "그러므로 연극의 특별함이란 살아있는 관객들의 현존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관객들의 현존은 것이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현전은 부유하고 사라지는 현존의 의미에서 (이것은 동시에 '지나가 버린', 부재하는, '이미 떠나버린' 것으로서 경험 안으로 들어온다) 극적 재현에 선을 그어 지워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재현의 저편을 탐새하는 일이 모든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쩌면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드라마와 연극이 서로 분리된 후 극적 형상구조와 다시 제휴하고 있는 새로운 연극에게 개방될 수도 있다. 드라마와 연극을 연결하는 다리는 서술적 형식이 될 수도 있고 단순하다 못해 심지어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오래된 이야기를 전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자연주의의 이미지 허상이 빠져나오기 위해 한층 의식적이고 인공적인 양식화로 귀한하기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어떤 것이 다가올 것이다. 브레히트를 함께 읽어 보자. 


겉으로 보기에 뒤죽박죽인 이것은 진기함에 대한 열망이다. 

결코 이것의 부치 밑바닥은 닳지 않을 것이다. 

이것의 책은 끝까지 읽히지 않는다. 

계속해서 이것의 생각을 잊을 것이다. 

이것은 세계이다.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아니라고 해도

모든 것은 새롭다

적어도 모든 옛 것들보다는 나을 것이다.